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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특히 회사에 권선징악은 없다

나도 가끔 '제이슨 본'이 되고 싶다.

by 구르미
102810_born_[X280,400].jpg 출처 : 시네21 (https://cine21.com/movie/info/?movie_id=6443)

드럽고 치사해서 내가 떠나고 말지


입사 초, 승진이는 동기 중 단연 돋보이던 친구가 있었다. 깔끔한 말투, 똑 부러진 태도, 그리고 전략적 사고까지. 말 그대로 일센스가 있었다. 승진이는 입사 1년 만에 지주사 전략팀으로 발령 났다. 당시 우리는 승진이가 진짜 ‘잘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임원이 될 수도 있겠단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2년쯤 지나 동기 모임이 열렸다. 다른 동기들은 그래도 간간히 봐왔는데 승진이는 매번 바빠서 못 봤었고, 2년 만에 만난 승진이는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고, 표정도 매우 어두웠다.

한창 술을 마시던 중 승진이가 말했다.

"이놈의 더러운 회사, 이제 끝이다. 나 오늘 인사팀에 퇴사한다고 했어."

"승진아, 네가 퇴사하면 난 이미 퇴사했어야 해. 난 완전 팀에서 투명인간이라니까? 아무도 나한테 신경 안 써주고, 일도 안 줘. 매일 회사 갈 때마다 오늘은 뭘 하고 버텨야 하지? 생각한다고. 전혀 기대감 없는 눈빛으로 일 시키는 상사의 얼굴을 넌 아냐?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잘 돼서 나 좀 끌어가 줘라."

"인정은 개뿔, 난 완전 노예야. 끊임없이 일을 시키고, 그놈의 기한은 길어야 한 시간이야. 매번 쫄리면서 보고 준비하고, 보고하고 나면 '넌 아는 게 뭐냐?', '이따구로 할 거면 그냥 집이나 가', '내 말 이해 못 해? 적어, 아니, 적지 말고 차라리 녹음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해?', '넌 생각이란 걸 하니? 받아쓰기만 할 거면 뭐 하러 여기 있니?' 사실 이 정도는 순한 맛인데, 맨날 이런 소리 들어봐. 사람이 정말 미친다니까."

잔뜩 상기된 얼굴로 격앙돼서 말하는 승진이의 모습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승진이의 표정은 너무나 진심이었다. 뭔가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설마 그만두겠어. 앞으로 미래가 보장된 자리인데. 라며 혼자 생각했다. 나름 승진이에 대해서 부러움이 많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승진이는 그달 말 정말 퇴사했고, 더 이상 승진이 이름은 시스템에서 검색되지 않았다.

'녀석, 진짜로 했네. 역시 넌 난 놈이다. 나라면 못했을 거다.' 혼자 이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부 공모가 올라왔다.


<특별 전배>

부서 : OO 홀딩스 전략기획

대상 : 4년 차 이상 대리/과장

특전 : 3년간 최고 고과 보장


승진이가 있던 자리였다. 무려 3년간 최고 고과라니, 성과 보너스만 고려해도 3년이면 거의 1억을 더 받는다.

혹하는 마음에 선배에게 물어봤다.


"형, 전략기획팀 공고 난 거 어때요? 저 한번 해볼까요?"

"르미야, 내가 진짜 너 아껴서 하는 말인데, 거긴 아냐. 절대로 쓸 생각하지 마. 내가 널 잘 알잖아? 너 거기 가면 길어야 한 달이야."

"그냥 일이 바쁜 거면 저도 버틸 수는 있어요!"

"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야."

"네? 왜요?"

"거기 상무가 완전 사이코라니까. 사람을 완전 짐승 부리듯 부리고, 성과도 다 자기가 뺏어가고, 폭언이랑 괴롭힘에 대해서 소문이 자자해."

"그럼 인사팀에서 징계는 없어요?"

"그 사람 천룡인이야. 아이비리그 나왔고 해외 주재원으로도 오래 있다가 왔어. 말 그대로 핵심인재."

"근데 그렇다고 징계가 없어요?"

"알아서 피해 간다고 봐야지. 소문에는 내년에 신규 사업부에 사장으로 갈 거라던데?"

"요즘에도 그런 게 가능해요? 드라마처럼 막 누군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이슈 터트리고 악인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하는 권선징악 같은 건 안돼요?"

"르미야, 그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저 사람은 살아 있었고, 그 위에 사람도 살아 있었어. 세상은 결국 사람이 움직여야 돌아가. 세상은 그렇게 장밋빛은 아니야. 앞이 안 보이는 잿빛이지. 세상은 불공평하고 이해 안 되는 일 투성이란 걸 잊지 마라."

"뭔가 씁쓸하네요. 고마워요 형. 형 덕분에 회사 더 오래 다니게 됐네요."


일 년 후 그 상무는 진짜로 새로운 계열사의 사장이 되었다.

괜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언젠간 벌을 받겠지, 하는 희망이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기운이 빠지고 무기력이 밀려왔다.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구나.


나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


그나마 이 이야기는 나에게 직접 연관이 없었는데, 몇 년 후 나에게 직접 영향을 줬던 일이 생겼다.

한창 일이 바빠 인력 충원을 수차례 요청했더니, 다행히도 경력으로 한 명이 들어왔다. 희수님이었다. 자기는 설카포를 나왔고, 바로 전 회사도 메이저였다고 하며 자기를 대우해 달라, 자기가 업무를 리드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프로젝트 리더였던 난 내 소신대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지현 님에게 중간발표 리더를 맡기고 희수님을 서포터로 지정했다. 그러자 희수님은 지현 님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자기가 티 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했고, 사람들에게 지현 님 험담을 일삼았다. 내막을 다 알고 있는 나로서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참다못해 한 번 정중하게 말했다.


“희수님, 그렇게 말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자 희수님은 방향을 바꿔 나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모아 내가 마치 나쁜 사람인 것처럼 얘기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내가 소규모 유닛의 보직장이 될 수 있던 타이밍이었다. 결과는 탈락. 내가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기도 전에, 이미 나는 그 소문 속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일로 난 사람에 질렸고, 사람에 치이는 일이 아닌 일에 치이는 일로 업무를 변경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믿었던 후배들도 혹시 날 험담하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나마 업무를 변경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지금은 조금 나아졌고, 다시 평온을 되찮았다. 물론 지나가다가 희수님과 마주칠 때면 아직도 심장이 뛰긴 한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치밀하게 증거를 모아서 저 사람 실체를 폭로해서 쓸쓸하게 회사에서 쫓겨나게 하고 싶다. 마치 영화 속 제이슨 본 처럼.


권선징악이 있을까, 회사에서?


회사에는 권선징악이 없다. 합리적이지 않은, 정상적이지 않은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그런 일 중에는 나와 연관된 일도 있을 테고, 내가 피해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면평가가 있다지만, 결국 위에서 바꿀 의지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정말 누군가를 ‘제대로’ 보내고 싶다면? 몰래 녹음을 하고, 증거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나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하는 일이다. 결국 나는 질문하게 된다. 이게 나에게 도움 되는 일인가?

나를 해친 그 사람 하나 보내는 게 과연 내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까? 나를 더 나아지게 만들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사람을 미워하며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내 몸을 쉬게 하고, 내 마음을 돌보는 편이 낫다.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나로서 더 평온해진다. 굳이 아까운 내 자유시간에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그 때 안 좋은 기분에 다시 빠질 필요는 없다. 그건 날 더 병들게 하고, 힘들게 할 뿐이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복수를 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도 없다. 복수를 한다고 내 기억이 바뀌는 건 아니니.


복수는 어렵지만, 날 지킬 수는 있다. 안 좋았던 기억을 굳이 다시 상기시키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그게 어쩌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해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善)이고 가장 진(眞)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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