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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Nov 18. 2021

양배추 모자를 쓴 아이

 어려서 우리 딸은 호흡기가 약해 자주 열이 나고 폐렴이나 급성 천식으로 이어져 입원을 하곤 했다. 열이라는 게 낮에는 괜찮다 싶다가도 희한하게 꼭 밤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올라 딸은 응급실 단골손님이었다. 그날도 전날 응급실을 다녀오고 낮엔 컨디션이 좀 괜찮아 보여 안심했는데 그러면 그렇늦은 저녁이 되자 열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



 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여러 통을 계속해서 걸어보지만 자꾸만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니 짜증이 밀려왔다. 물수건만 대도 예민한 딸아이는 넘어갈 듯 울음을 터트리는데 불현듯 양배추를 모자 속에 넣고 열을 식혔다는 야구 선수 이야기가 떠올라 냉장고를 뒤졌다. 다행히 양배추 한 통이 있어 한 잎씩 떼서 머리에 씌우니 모자처럼 잘 맞다. 때마침 주변을 산책하시던 친정 부모님이 손녀도 보실 겸 전화를 하셨다. 사정 얘기를 하니 부랴부랴 오셔서 보신 꼴이란 게 지친 딸이 안고 있는 양배추 모자 쓴 손녀라니...ㅇ서방은 어딜 가고 너 혼자 이러고 있냐고 말씀하시는 엄마 목소리에 원망이 섞였다. 아빠는 그 와중에 핸드폰을 꺼내 양배추 모자를 쓴 손녀 사진을 찍기 바쁘시다.

 

아버지의 초점 나간 사진 실력이란...


 양반은 못 되는지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다짜고짜 어디냐고 물으니 우물쭈물 대답을 못한다. 애가 다시 열이 나 응급실에 가야겠으니 빨리 오라는 말에 당황한 듯 힘들겠단다. "너 도대체 어디야!" 소리를 지르고 만다. "포항..." 친구가 여자 친구와 헤어져 위로하고자 포항을 갔단다. "하아... 환장하겠네." 당장이라도 내가 포항엘 가서 다 아작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갈게. 바로." 끊자마자 한숨과 함께 전화기를 던져 버리자 옆에서 통화를 듣던 엄마는 서두르다 사고 난다며 천천히 오라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나를 재촉하셨다. "사고가 나든 말든." 퉁명스러운 나의 말에 이미 그렇게 된 걸 어찌하겠냐고 나를 달래시는 엄마 속도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곁에 누군가 있으니 혼자 동동거릴 때보다 한결 안심이 되었다. 엄마 아빠는 열이 조금 잦아들어 딸아이가 잠이 들고서야 집으로 돌아가셨다. 가시면서도 화내지 말고 좋게 얘기하라는 말씀도 함께 덧붙이셨다.


 그날 밤, 남편은 12시가 넘어서야  슬그머니 들어왔다. 숨이 죽어 널브러진 양배추 잎사귀에 무슨 일인가 싶지만 큰 눈에 화염 방사기처럼 불길을 쏟아낼 듯 앉아 있는 날 보고는 묻지 못하고 방으로 가 아이를 살폈다. 양배추 잎을 걷어 죄다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화를 한풀 꺾어주셨다. 자칫 양배추 싸대기가 탄생할 뻔했다.

 

 여전히 모임도 많고 친구도 많은 인싸이긴 하나 나이가 드니 남편도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귀가 시간도 당겨졌다. 나이 들면 달라지더라는 말이 우리 집엔 먹히지 않겠다 했는데 가끔은 너무 일찍 들어와 나도 주변에 출장 가는 사람 있으면 좀 데려가라고 농담을 하는 여유가 생겼다. 허나 그래도 두고보라지! 곰국 대신 남편 머리에 양배추 씌우고 울랄라 놀러 나갈 날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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