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뛰어든 성녀들을 기리며

클레어 키건의『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가끔씩 '내 사람'에게만 드는 애정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가족, 나의 개, 나의 친구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을 긋고 안과 밖을 구분한다. 자아를 확장하고 타자와 구분하여 대한다. 왜냐하면 내 사랑은 제한되고 시간은 유한하며, 상처받기는 두렵기 때문이다.


나와 내 사람들의 행복 추구권이 타인의 기본 권리보다 우선하는가? 친한 친구의 생일 선물로 내가 재밌게 읽었던 책을 사고 행복하게 거리를 지나던 날, 빈민국 아이를 위한 모금함 앞을 지나치던 그때, 나는 조금 구역감을 느꼈다.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지나치지 못하는 것들.


(본 서평은 소설 및 영화의 전체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스포주의)


소설 안에서


p.11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113 사람들 말이 배로강에 저주가 내려졌다고 했다....... 그래서 해마다 강이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세 사람의 목숨을 가져간다고 했다.

옮긴이는 존 맥가헌을 인용하며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했다.(p.128)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그중에서도 재독을 권하고 싶다. 작가의 문학적 트릭이 굉장히 세련되었으며, 옮긴이의 설명 또한 굉장히 도움 되었다.


소설은 시간적으로는 주인공 빌 펄롱의 일생 중 1980년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가지며, 공간적으로는 배로강과 마을을 주목한다. 그는 아내 아일린과 딸 다섯과 함께 살며 석탄 회사를 운영하는 건실한 인물이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가진 옆집 아이에게 잔돈을 줬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둘 다 지역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에 다녔고, 경기가 좋지 않지만 나머지 세 딸 또한 그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게 펄롱의 결심이다.(p.24)

행복하고 그린 듯이 아름다운 가정이지만, 펄롱의 유년시절은 조금 달랐다. 그는 미혼모인 세라 펄롱 밑에서 태어났고, 과부인 미시즈 윌슨의 손에 자란다.

p.29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살아가기. 건실하게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잘 키우는 생활에 의문을 느끼기도 한다.

p.44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탄 배달을 간 수녀원에서 학대당하는 세라를 만난다. 수녀원장은 세라에게, 그리고 펄롱에게 이 일이 사소한 일임을 강요한다.

p.79 "그게 뭐였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어요."

마을에서 막강한 위치에 있으며, 자녀들의 교육에도 관여하는 수녀원장이기에 펄롱은 고뇌한다.

p.22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가족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집에 돌아가는 길, 펄롱은 결심하고 다시 수녀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펄롱과 세라는 수녀원에서 도망치며 배로강을 지나 동방박사와 아기예수 모형을 본다.

p.119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본 소설의 결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간의 가능성이 서사의 필연성으로 도약하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날 때,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 얻게 된다....... 이런 결말 뒤에, 감히, 어떤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

p.121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설 밖에서

소설의 배경인 1940-80년대 아일랜드는 내전과 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여전히 머물러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이민으로 떠나갔고, 수입 감소로 석탄은 산업에만 쓰여야 하며 가정의 불을 지피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소설은 이런 시대상황을 몇 차례 언급한다.

p.23 1985년이었고 젊은 이들이 런던, 보스턴, 뉴욕 등으로 이민을 떠나고 있었다....... 수상이 대처 수상과 북아일랜드 관련 협정을 맺었고, 벨파스트의 연합주의자들은 더블린이 자기네 문제에 간섭하는 것에 항의하는 뜻에서 북을 치며 행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자-매춘부, 미혼모, 고아-들은 더욱 거리로 내몰려졌고, 가난한 정부 대신 종교가 구제활동을 담당했다.

p.48-9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목자수녀회는 기초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했다. 또 수녀원에서는 세탁소도 겸업했다. 직업학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지만,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다....... 어떤 사람은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알려진 것처럼 학생이 아니라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 하기도 했다.

작중 사건은 실재했던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아일랜드 정부는 지난 2013년 공식적으로 10,000명 이상의 여성을 '노예화'한 데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소설의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 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 부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 아일랜드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16) 발췌


영화에 대하여


소설을 바탕으로 24년에 개봉한 영화다. 아일랜드 배우인 킬리언 머피가 주연을 맡았고 흥행에 성공한 것 같다.


소설의 영화화에 대해서 잠깐 말해보자면, 나는 텍스트를 영상보다 좋아하는 편이다. 행간의 여백을 상상으로 채울 수 있다는 이유도 맞지만, 영상이 주는 소리와 시각이 자극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관에서는 책과 달리 능동적으로 멈출 수 없기에 두렵다.

다만 이 영화는 소설 자체의 슴슴한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 그 두려움이 덜했다. 소설 속 주요 대상물을 재현하는 수준도 뛰어났다. 예전에 정말 좋아하는 소설 마틴 에덴의 영화화를 봤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설 속 중요한 행동을 반대로 옮겨놨기 때문에......


예를 들면

p.17 학교에서 펄롱은 비웃음과 놀림을 당했다. 외투 뒤쪽이 침 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날도 있었지만...(후략)
p.23 어느 이른 아침 펄롱은 사제관 뒤 쪽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봤다.

사제관 뒤편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고양이에게 줄 우유는 있으면서 정작 아이는 보지 못했던 걸까?

영화에서 석탄이 묻은 손을 닦는 장면으로 펄롱의 심리를 묘사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킬리언 머피가 멋있었다. 정확히는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역할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상형이 바뀌었다.



해석



펄롱은 삶과 그 가치에 대해 고뇌하는 인물이다.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인지, 본래 사람됨이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맘 편히 혹은 의도적으로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이들과는 다르다

p.93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필통은 다른 남 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p.57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마을사람들이 따르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겼다면 펄롱은 세라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p.103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따뜻한 벽난로, 가족, 선물 같은 것이 연상된다. 하지만 집 밖의 사람들은 추위에 떨고 그 간극은 넓어진다. 그 균열에서 빌 펄롱은 경계를 넘어간다.



동정녀 마리아를 박해하는 교회


마을을 지배하는 가톨릭은 신앙의 역할을 잃었다.

p.81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요." 주님을 그 사람들하고 비교할 수는 없지요."

그들은 사람들을 계층화하고 미혼모를 교화의 대상으로 여긴다.


세라 펄롱은 빌 펄롱을 낳았다. 아버지 또한 소설 속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난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수녀원의 소녀 세라 레드몬드가 그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다는 것이다. 세라 펄롱은 미시즈 윌슨 덕에 온전한 삶을 누렸지만, 수녀원의 세라는 그러지 못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예수를 가졌던 동정녀 마리아와 그녀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왜 마리아를 믿는 가톨릭은 그녀를 박해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세라가 마리아라면, 그를 구원하는 빌 펄롱은 예수다. 아니, 세라 펄롱이 낳은 빌 펄롱이 이 기적을 반복하고 있다. 작가는 어쩌면 구원의 선순환, 혹은 참된 가톨릭의 지향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펄롱이 석탄 배달부인 점도 흥미롭다. 본래 크리스마스에서 나쁜 아이들에게 석탄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아이러닉 하다.

p.102 학교에 안 간 아이들이 달려 나와 석탄 자루를 들고 온 펄롱을 산타클로스라도 되는 양 반갑게 맞았다.



마무리하며

한 줄 평 / 별점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성녀들을 기리다

★★★★☆


아름다운 결말이며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소설과 영화였다. 다만 영화에서 마지막에 세라의 손을 잡고 가족에게 가는 장면은 또 다른 가족주의의 반복이 아닌가 의문이 든다. 다른 대안은 알 수 없으나, 이야기 중반부에 등장한 또 다른 세라들은 어떻게 되는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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