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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5. 귀신이다!

그 장면,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그 장면이 떠올랐다.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다 억울하게 죽은 여고생이 학교를 떠나지 못하다가 교사가 되어 되돌아온 친구를 향해 ‘쿵.쿵.쿵.쿵.’ 다가가던 그 장면 말이다. 뜬금없이? 이유가 있다. 엘리트, 특히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엘리트 펜싱 선수의 공격은 정말 귀신같아서, 그 장면을 떠올릴 정도로 놀랍고 무섭다.      


우리나라 여느 스포츠 종목이 그렇듯 펜싱도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 따라 선수를 양성한다. 우리나라에선 그리 대중화되지 않은 탓에 펜싱부를 운영하는 몇몇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선수가 길러진다. 대한펜싱협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해보면 초등학교에서도 팀을 운영하는 것으론 확인되지만 등록된 선수가 없는 경우도 다수다. 오히려 초등학교는 최근 몇 년 새 늘어난 사설 펜싱클럽을 통해 입문해서 펜싱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우리 펜싱 스승님은 지금의 펜싱클럽 문을 열기 전에 학교에서 엘리트 선수를 지도했다. 그때 스승님에게 배운 선수들이 가끔 클럽을 찾아온다. 따지면 같은 스승을 둔 동문이고, 무협지 식으로 하면 사(師)형제라고 할까? 그들 중에는 국가대표로 혁혁한 성적을 내고 있는 T 선수도 있다.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에서 최정상에 오른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세계 대회에서도 입상 경험이 있는 선수다. 말 그대로 펜싱계의 월드 클래스다.      


T 선수가 2019년 3월 어느 날 우리 클럽을 찾았다. 그날 T 선수는 우리 클럽 모든 회원들과 한 게임씩 연습 경기를 뛰어주었다. 아마추어 동호인이 현역 월드 클래스와 검을 맞대 본다는 건 다시없을 기회고 영광이다. 스승님의 후광이 없다면 누려보기 어려운 호사다. 운동 장비를 모두 챙겨 온 그는 주섬주섬 도복을 챙겨 입고, 경기에 나섰다. 몸을 따로 풀 것도 없이 곧장 시합에 나서는 그 담담함이란!     


하나, 둘 동료들이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고 내 순서가 돌아왔다. 경기라곤 하지만, 그에겐 몸풀기 수준도 안 될 가벼운 러닝 정도였을 거다. 하지만 나에겐 칼을 맞대고 선 순간부터 긴장감과 중압감으로 몇 배는 더 힘든 경기였다. 긴장감과 중압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와 시합에서 귀신을 봤다.     

 

‘쿵.쿵.쿵.쿵.’, 정확하게는 ‘쿵···, 쿵팍’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귀신 같이 다가온 그의 공격은 순식간에 내 가슴에 꽂혔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팡트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이렇게 하는 거예요’하고 말하는 듯한 가벼운 마르셰 팡트였다. 억울하게 죽은 친구의 무서운 등장에 비명도 제대로 지를 틈이 없었던 주인공처럼, 반응할 틈도 없었다.      


스승님의 제자 중 엘리트 선수 생활을 했거나 하고 있는 이들과 경기를 뛸 기회가 종종 있지만, 다른 이로부터 T 선수 같은 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들 역시 아마추어 펜서가 감당하기 어려운 스피드를 가졌지만, T 선수는 그저 ‘빠르다’고 표현하는 걸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에겐 다른 선수들에게선 느낄 수 없던 깃털 같은 가벼움이 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가속도 공식을 빌어 설명하면, 일정한 질량이 있는 물체를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선 그만큼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걸 우리는 f(힘)=m(질량)a(가속도)라고 배웠다. 다른 선수들에게선 육안으로 이 공식이 확인된다. 그들의 마르셰 팡트는 가속도 만큼의 힘도 그대로 발산한다. 하지만 T 선수의 마르셰 팡트는 큰 힘의 발산 없이 순간적인 가속도만 ‘쿵.쿵.쿵.쿵.’ 느껴진다. 마치 질량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귀신같다는 거다.     


‘쿵.쿵.쿵.쿵.’의 인상이 너무 깊게 각인돼 본의 아니게 T 선수를 ‘찬양’하다시피 했지만,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능력치가 예상을 넘어선다. 우리 클럽에서도 초등학교 때부터 펜싱을 배워 펜싱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한 선수가 있다. 간혹 클럽을 찾아와 함께 운동을 하는데,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한 경기를 뛰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T 선수도, 중학생 선수도 경기를 뛰어보거나 옆에서 지켜보면 동호인과 차이는 동작의 간결함이다. 수없이 많은 시간 갈고닦은 기술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 깔끔함은 체력 소모를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공격해 점수로까지 이어진다.     


그에 비해 나는 허우적 된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정도로 동작이 크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허우적이다. 배우긴 그렇게 안 배웠다는 걸 나도 안다. 배운 걸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몸이 반응해버리는 상황일 뿐이다. 어쩌면 ‘본능’ 같은 것이고, 몸에 익은 ‘쪼’라고 해도 크게 다르진 않다. 본능이든, 쪼든 억눌러야 허우적 됨은 사라지고 간결하고 정확한 동작이 가능할 테다. 그리고 그건 ‘시간’ 말곤 달리 해결책도 없다.    

  

1만 시간의 법칙으로 계산해보면, 매일 3시간씩 10년이 필요하고, 10시간씩이면 3년이 필요한 그 시간이다. 엘리트 선수들의 간결함은 매일 3시간, 또는 10시간에 가까운 운동량이 이어진 결과물일 테다. 그렇다면 나는? 매주 3회, 1시간씩이면 몇 년이 필요할까? 계산이 무의미할 것 같은데··· 64년이 필요한 운동량이다. 처음 펜싱을 시작한 2017년을 기준으로 64년이면 95살이 되는 시점이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가능하다고 가정해도 그중 고작 5년이 지났다. 이성보다 본능에 더 충실한 다섯 살 배기를 생각하니, 본능 같은 허우적은 당연한 일이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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