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를 하나, 둘 구비하면서 펜싱에 대한 흔한 오해(?) 또는 인식을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바로 ‘귀족 스포츠’라는 오해 또는 인식이다. 동료 기자들 중에서도 펜싱을 한다는 이야길 하면 “오, 귀족 스포츠~”라고 단순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꽤 있다. 펜싱이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 내지 오해는 아무래도 대중화되지 않아서 접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는 생각도 한 축을 담당할 거다. “오, 귀족 스포츠~”에 이어 “부자였구나~”라고 덧붙는 것만 봐도 그렇다(기자 월급 뻔한 건 그들도 알면서).
대중화되지 않아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건 현실적인 조건이어서 반박의 여지는 없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때 우리나라 펜싱 선수단 성적에 따라 그 현실은 조금씩 깨어지고 있다. 도쿄올림픽 이후엔 내가 다니는 펜싱클럽에도 신규 회원이 반짝 증가했고, 스승님도 이 무렵에 전화 문의가 많이 온다고 말하곤 했다. 축구나 야구, 배구처럼 프로 리그가 정착되어서 TV 중계로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닌 이상, 4년 마다 올림픽을 통해 겨우 접할 수 있는 여느 비인기 종목과 펜싱은 처지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요즘엔 일반인도 펜싱을 접할 수 있는 펜싱클럽이 많이 문을 열었다. 남현희, 최병철, 신아람 같은 유명한 국가대표 출신들도 그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남현희의 경우에는 은퇴 후 펜싱클럽을 여는 과정에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펜싱 저변 확대를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2020년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도 썼는데 그 제목이 ‘국내 펜싱의 저변 확대를 위한 기초조사 연구’다. 이전부터 펜싱클럽의 대중화에 힘써온 이들과 남현희 같은 ‘네임드’의 유입이 시너지를 낸다면 접할 기회가 없어서 생기는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은 조금씩 무너질 것으로 보인다.
비용이 많이 필요할거라는 선입견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하나는 펜싱을 배우는데 드는 비용, 이른바 강습료이고 다른 하나는 장비 구입에 필요한 비용이다. 펜싱클럽마다 운영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기본 강습료만 놓고 보면 펜싱이 고비용의 운동은 아니다. 최근 늘어난 강습 스포츠들, 요가나 필라테스, 헬스장 PT(personal training)와 견주어 볼 때도 그렇고, 대표적인 귀족 스포츠로 인식된 골프와 비교해도 그렇다. 물론 1대 1 레슨비는 천차만별인데, 이는 다른 스포츠들도 마찬가지다.
장비는 풀 세트를 모두 구비하는데 드는 초기 비용이 크다면 크다. 상·하의 도복과 프로텍터, 마스크, 펜싱화, 장갑, 블레이드, 바디 와이어(심판기 연결선)는 기본이고 플뢰레, 사브르는 메탈 자켓도 구비해야 한다. 처음 입문한 펜서들은 각 클럽마다 구비하고 있는 공용 용품을 사용할 수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내 것’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스포츠는 ‘폼’이 나야 제 맛이고, 동네 앞산을 올라도 에베레스트를 오를 만큼 장비를 갖추는 게 대한민국인의 미덕이 아니던가. 야금야금 장비를 갖추다 보면 돈 100만 원은 기본으로 들어가는데, 세트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200만 원도 가뿐히 넘는다.
나의 경우엔 가성비를 따져서 저렴한 것으로 갖췄지만 모두 구비하는데 100만 원은 훌쩍 넘게 들었다.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하나씩 야금야금 구입해나가는 거다. 클럽마다 조건이나 개인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는데 꼭 한 번에 모두 갖출 필요는 없다. 나는 모든 장비를 갖추는데 대략 3년이 걸렸다. 스스로가 원체 장비 쪽으론 관심이 많지 않고, 실력이 없으면 장비빨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클럽에 마련된 공용 물품이나 이전에 다니던 펜서들이 내버려두고 떠나버린 장비가 꽤 있는 덕을 봤다.
한 달 만에 블레이드 한 자루를 먼저 구입했고, 넉 달 차에 펜싱화와 장갑을 샀다. 첫 대회를 다섯 달 만에 나갔는데 다른 장비는 모두 공용 장비나 주인 없이 남겨진 장비를 사용했다. 중간에 운동을 쉰 사정이 있지만, 도복과 메탈 자켓은 1년 6개월 만에 구입했고, 마스크는 끝까지 구입을 미루다가 대회 규정이 바뀌면서 3년 만에 마련했다. 내 것이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코로나19 이전의 이야기라는 건 감안해야 겠다. 바이러스 탓에 요즘은 공용 물품이 썩 내키지 않을 수 있고, 공용 물품은 노후화로 대회 규정에 맞지 않을 여지는 있다.
한 번 갖추면 그걸로 끝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도복은 한 벌로 어떻게든 버텨본다 하겠지만, 플뢰레와 사브르에 필요한 메탈 장비는 수명이 있다. 많이 사용할수록 장비가 헤져서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나는 메탈 자켓 구입 후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두고 있다. 매주 한 번 있는 연습 경기 때도 공용 장비를 쓴다. 메탈 자켓을 입는 날은 1년에 몇 안 되는 공식 대회에서다. 시합용 메탈 자켓을 고이 모셔두는 동호인 펜서는 나뿐만은 아니다. 그 탓에 클럽 내 연습 시합 때는 소위 ‘흰불(타겟이 아닌 곳을 공격했을 때 켜지는 심판기 신호) 자켓’이 많이 등장한다.
블레이드는 소모품에 가깝다. ‘우주의 기운’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지만, ‘절대’ 부러지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충격이 쌓이고 쌓이면 작은 충격이나 실수에도 부러지고, 서툰 사람이 사용하다간 개시한 날 부러져버리기도 한다. 내 경우에도 6년차인 현재까지 5자루를 부숴먹었다. 나 정도는 ‘해먹는게’ 아주 적은 축에 든다. 힘이 좋은 검독수리 D는 1년에도 4자루씩 해먹는다.
펜싱 장비는 제조업체 서너개 정도가 과점하는 양상이다. 영국 L사, 독일 A사, 이탈리아 N사가 대표적이고 헝가리 P사, 미국 A사, 이탈리아 C사 등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L사와 A사 제품을 이용하는 펜서가 많다. L사와 A사 제품이 성능이나 맵시면에서 낫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있지만, 유통구조 탓이 더 크다. 우리나라는 펜싱 장비 유통도 2개 업체 정도가 과점하면서 L사와 A사 중심으로 보급하고 있다. P사 제품을 중심으로 제공하는 업체가 후발주자로 있지만 인지도 면에서 뒤처진다. 왜? 라는 의문이 가능하지 않은 과거부터 그렇게 시장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Say)의 말마따나 공급이 수요를 스스로 창출한 모습이다.
세이의 법칙은 사실, 완전경쟁시장일 때만 공급자와 수요자 양측이 모두 만족할 수 있다는 태생적 모순이 있다. 태생적으로 모순을 갖는 이유는 조건이 달성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두 주체인 공급자와 수요자가 완전하게 합리적이고, 경제적으로만 사고하는 경제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여야 한다. 쉽게 풀어서 경제적으로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으, 생각만 해도 끔직한 모습일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행위자가 갖는 정보나 소득, 문화적 소양이 차이 없이 동질해야 한다. 시장에서도 상품에 대한 지식과 가격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공개되고 수요자는 정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조건이 충족만 된다면야 공급자와 수요자는 최고의 상품을 적정한 가격에 팔고 살 수 있다.
세이의 조건은 현실에서 충족 불가능하다. 애초에 달성 가능하지 않은 조건에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면 상대적으로 수요자가 불리한 입장에 처한다. 특히 상품이 수요자에게 꼭 필요한 물품일 경우에 더 그렇다. 펜싱 장비 유통 시장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품질이 동일한 상품 가격이 오른다. 무엇보다 펜서에겐 절대 없으면 안 될 소모품인 블레이드 가격 상승이 눈에 거슬릴 정도다. 품질이 향상되는 건 아닌데 가격만 오른다. 바디 와이어도 가격은 올랐는데 왠지 고장은 더 잦은 것 같다. 울며 겨자먹기로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나마 요즘은 해외 직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유통 경로가 있어서 클럽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해외 직구를 통해 조금은 저렴하게 장비를 들여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펜싱이 귀족 스포츠라는 오해를 받는다는 이야기에서 펜싱 장비 유통 시장까지 흘러왔지만 나는 이게 다 연결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펜싱이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져서 더 많은 사람이 즐기는 스포츠가 된다면, 저절로 귀족 스포츠라는 오해는 불식될 것이다. 동시에 장비 유통 시장에도 변화를 불러 올 것이다. 제품을 꼼꼼하게 따져보거나 해외 직구를 하는 소비자도 늘면, 저절로 유통 업체 스스로도 가격 조정 압박을 받을 것이다. 시장 규모도 커지니까 새로운 공급자도 생기고, 공급자간 경쟁이 유발되기도 할 것이다. 벌써 기존 유통업체와 다르게 펜서들과 호흡하는 젊은 유통업체도 새롭게 생겼다. ‘귀족의 소멸’은 역사적으로 시대의 진보와 함께 했으니, 우리나라 펜싱계의 진보도 그렇게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