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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2.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아야

2017년 8월 24일, 펜싱을 시작하고 약 두 달 만에 첫 장비를 마련했다. 처음 마련한 장비는 당연히 칼이다. 블레이드(blade)라고 보통 부르는데, 정확하게는 칼 몸체에 해당하는 블레이드와 가드, 손잡이로 구성되는 한 세트가 칼이다. 간혹 그 칼에 찔리거나 맞으면 아프지 않냐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당연히 아플 때도 있다. 특수하게 제작된 도복이 일정하게 충격을 완화시켜주지만 그래도 아플 때가 있다. 요즘은 덜하지만 초심자 시절엔 오른쪽 팔뚝과 허벅지, 가슴이 퍼런 멍투성이기도 했다.     


그래도 심각한 부상까지 이어지진 않는데, 과학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2016년 <한겨레>가 보도한 ‘펜싱,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까닭’이란 기사를 보면 꽤 상세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우선은 희생자가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남자 플뢰레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 선수가 1982년 경기 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해 7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펜싱선수권 대회에서 시합 중 부러진 상대 선수의 칼이 그대로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금메달리스트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는 그것이 실력과 상관없이 ‘운’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제펜싱연맹이 도복과 장비에 대한 안전 기준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어야 안전 기준이 엄격해지는 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뒷맛은 씁쓸하다. 그의 희생 덕분에 오늘의 펜서들은 훨씬 안전한 환경에서 펜싱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도복은 방탄복을 만들 때 쓰는 소재나 그에 준하는 대체물로 만들도록 했다. 적어도 163kg 정도에 해당하는 힘(1,600뉴턴)은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동호인은 도복 안에 플라스틱으로 된 가슴 보호대도 사용하곤 한다. 플뢰레와 사브르는 도복 위에 전자 자켓도 입는데 이것 역시 도복의 절반에 해당하는 82kg 정도의 힘(800뉴턴)을 견뎌야 한다.     


펜싱을 시작하고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남자의 경우 프로 선수들은 플라스틱 가슴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는다. 대신 350뉴턴(약 36kg) 정도를 견디는 천 보호대를 쓴다. 플라스틱 보호대가 칼을 튕겨내는 효과가 있어서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펜싱에는 불이익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보호대 없이 시합을 뛴다니?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윽,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생각했더랬다. 아무리 방탄복을 만드는 소재라도 천은 천이고, 163kg을 견뎌내더라도 맥주 캔이든 수박이든 쉽게 뚫고, 쪼개는 파괴력을 완전하게 줄여줄리 만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됐다. 2019년 하반기부터 동호인 선수를 대상으로 한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플라스틱 보호대 착용 대신 천 보호대 착용으로 규칙이 바뀌어 버린거다. 플라스틱을 착용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엔 플라스틱 보호대 위에 쿠션 역할을 할 수 있는 티셔츠를 한 겹 더 입도록 했다. 2019년 대한펜싱협회장배를 나가면서 고민 끝에 나도 플라스틱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고 시합에 나선 적이 있다. 긴장감 때문인지, 아드레날린 분비 때문인지, 다행히도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않고 대회는 마무리했다. 하지만 클럽 자체 연습 시합을 할 때는 여전히 플라스틱 보호대를 빼놓지 않는다.  

   

머리를 보호하는 마스크의 안전 기준은 더 엄격하다. 마스크는 흔히 우리에겐 ‘스댕’으로 알려져 있는 스테인리스 강(stainless steel)으로 만든다. 다른 금속과 달리 부식되거나 녹이 슬지 않기 때문이다. ‘스댕’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느냐 싶지만, 마스크의 앞면 그물코를 짜는 것도 엄격한 규격이 있어서 규격에 따라 촘촘하게 짜진 그물코는 웬만한 힘에는 파손되지 않는다.    

 

블레이드는 한 발 더 나간다. 마레이징 강(maraging steel)이란 금속으로 제작되는데 이 금속이 ‘우주의 기운’이 있다. 마레이징 강은 500도가 넘는 고온에서도 강도가 유지되는 고급 금속 소재다. 미국이 우주선이나 미사일 같은 걸 만드는데 사용하기 위해 개발했다. 유엔 안보리는 마레이징 강이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사용될 것을 우려해 북한으로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레이징 강은 웬만한 휘어짐에는 바로 제 모습을 찾을 정도로 쉽게 부러지지 않는 유연성을 가졌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진 않는다며 대나무의 절개를 칭송하지만, 펜서만큼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마레이징 강처럼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아야 상대와 나를 지킬 수 있다.     

▲2017. 8. 24. 처음 산 내 블레이드.                         

그렇다고 해서 마레이징 강이 절대 부러지지 않는 건 아니다. 같은 강도의 블레이드 끼리 부딪힘이 잦으니 상처도 생기고, 같은 부위가 반복적으로 휘어지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상처가 쌓이고 강함도 무뎌지면 그 수명을 다하고 부러진다.  


   

2017년 8월 24일 내 곁에 온 첫 블레이드는 강한 금속 재질 덕분인지, 내 힘이 부족한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농땡이를 부린 탓인지 알 수 없지만 1년 하고도 9개월 만인 2019년 5월 24일에야 그 수명을 다하고 부러졌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직장, 첫 월급···. 모든 처음은 설레고 아련하기 마련인데, 첫 칼이라고 다를까. “2017.8.24. 내게 처음 온 너, 장렬히 떠나가네.” 내 첫 칼에게 조문(弔文)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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