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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0. 긴, 칼의 대화

“살살 꼬셔야 해요. 꼬실 줄 몰라.”   

  

압도적인 스피드와 힘을 가진 게 아니라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펜싱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속여 빈틈을 만들어야 공격이 수월해진다. 스승님은 상대를 속이는 동작을 알려줄 때 자주 ‘꼬셔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 칼을 꼬셔내서 헛손질을 유도하고 그 빈틈을 노려 공격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잘 꼬실 줄 모르는 나는 그래서 공격이 어렵다. 차라리 나를 꼬셔내려는 상대에게 현혹되지 않고 반격하는 쪽이 더 수월하다.     


어떤 영역에서든 상대를 꼬셔내는 일은 기본적으로 매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매력’이란 게 상대적인 개념이라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빼어난 외모나, 든든한 재력, 그것도 아니면 화려한 언변이라도 있어야 ‘매력적인 사람’으로 꼽힐 수 있다. 물론, ‘뷰티한 인사이드’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의 한 요소이긴 하다. 하지만, ‘뷰티한 인사이드’를 파악하는 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꼬시다’의 사전적 의미가 꾀다의 ‘속된’ 표현으로 정의되는 건, 적어도 ‘꼬실’ 때는 그만한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짧은 시간에 상대를 ‘꼬실’ 때는 누가 뭐라해도 직관적인 외모나 통장 잔고 확인하듯 확인이 용이한 재력, 재미있는 농담 한 두 번이면 드러낼 수 있는 화려한 언변이 우선할거다. 외모가 빼어나지도, 재력이 든든하지도 않은 처지인 나는 언변도 화려한 성격이 못된다. 펜싱에서도 그런 성격이 드러난다. 펜싱은 이성을 꼬시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상대를 현혹해내야 한다. 그만큼 페인팅 동작은 더 직관적이면서 매혹적인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상대를 꼬셔서 빈틈을 노리는 페인팅 동작이 안 된다. 상대방이 혹할 정도로 매력적인 페인팅 동작을 할 수 없고, 상대방이 혼동할 정도로 화려한 페인팅 동작도 할 수 없다. 어설픈 동작으로 상대를 꼬셔보려다 반격당하기 일쑤다. ‘매력’이란 것과 인연이 없는 현실이 펜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그 탓이 아니라면 내어줄 것과 지켜야 할 것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망설임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브르 선수로선 처음 올림픽 메달을 딴 김정환 선수는 펜싱을 두고 몸으로 두는 장기라고 했고, 흔히들 몸으로 하는 체스라고 펜싱을 일컫는다. 장기든 체스든 상대방 왕을 잡기 전까지 내 왕은 지키면서 적절하게 다른 말을 내어주고, 또 차지해야 최종적인 승리에 이를 수 있다. 내걸 하나도 잃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장기든 체스든 제대로 둘 순 없다.     


펜싱도 그렇다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이기는 건 쉽지 않다. 마지막 위닝 포인트를 얻기 전까지 한 점도 주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그러지 못 할 바에는 점수를 잃는데 인색하면 안 된다. 다만 점수를 빼앗기던 상황을 역이용해 다음 공격에선 득점에 성공하거나, 다시는 같은 허점을 노출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승리에 이르도록 빼앗긴 점수를 발판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직업적인 영향인가 하는 생각도 때때로 한다. 내 일은 주로 상대의 설명과 주장을 듣고, 이해해서 전달해주거나 반박하는 것이다. 설명과 주장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적절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질문은 화려할 필요가 없다. 핵심을 적확하게 짚는 게 중요할 뿐이다. 오히려 간결한 게 더 나을 수 있다. 장황한 질문은 상대방이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거나 핵심을 빗겨나 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상대가 온갖 미사여구로 꾸미고, 어려운 말로 설명하더라도 그 안에서 진실을 찾고, 간단하게 핵심을 짚어서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한다.     


펜싱의 심플 마르셰 팡트는 적확하고, 핵심을 짚는 질문을 닮았다. 개인적으로 심플 마르셰 팡트로 점수를 따내면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단지, 심플 마르셰 팡트를 성공시키는 게 쉽지 않을 뿐이다. 심플 마르셰 팡트는 공격 타이밍을 절묘하게 잡아내거나, 압도적인 운동 능력으로 상대가 옴짝달싹 못할 정도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압도적 운동 능력을 바랄 수 없는 내 경우엔 절묘한 공격 타이밍을 잡아내는 것 말곤 성공시킬 방도가 없다.      


상대를 꼬셔내는 페인팅에도 재능이 없고, 망설이며, 압도적인 운동 능력도 바랄 수 없는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긴 대화’를 시도한다. 첫 눈에 혹할 만한 매력은 가지지 못했더라도, 내 말을 내어주는데 서투르더라도,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지 못하더라도, 긴 시간을 들여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진심이 있다면 사랑도, 승리도, 일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펜싱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들더라도 상대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내 심플 팡트에 상대는 한 발 더 빠지며 막는지, 빠지진 않은 채 반격에 중점을 두는지, 공격은 어떤 걸 선호하는지, 진지하고 담백한 ‘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큼 승리로 가는 지름길도 없다. 설령 이번에 이기진 못했더라도 그 대화가 진실했다면, 패배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거다. 언제고 다가올 다음 승부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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