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에서 제일 중요한게 거리조절이거든. 지금 내가 그걸 못하네. 내가 너무 많이 기대했다. 고유림한테도 너한테도.”라는 나희도의 대사를 들으며 무릎을 쳤다. 맞다. 펜싱에서 상대를 꼬셔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거리다. 상대와 나 사이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공격에 성공할 수 없고, 공격을 막아낼 수도 없다. 피치 못하게 기본 2미터 거리를 두는 것이 에티켓이 되어버린 세상처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펜싱에서도 기본 2미터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좋다.
가장 거리두기에 민감한 에페는 칼 길이가 1미터 10센티미터인데 두 선수가 칼을 쭉 뻗어서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둔 상태에서 시합을 시작해야 한다. 팔 길이와 칼 길이를 더하면 대충 4미터 정도의 거리가 두 선수 사이에 생긴다. 그 거리를 적절하게 좁히고 늘리면서 공격 타이밍을 잡는 게 펜싱이다.
연애 초반의 ‘밀당’과 닮은 것이 펜싱의 거리 조절이다. 너무 밀어냈나 싶으면 당기고, 너무 당겼나 싶을 땐 밀어내야 미묘한 감정선이 서로를 긴장시키고 애정을 고무시킨다. 너무 밀어내면 그(녀)는 떠나버리고, 너무 당겨도 그(녀)는 질려한다. 펜싱도 마찬가지다. 너무 멀리 떨어져서 공격을 하면 내 공격이 상대에게 가닿지도 않는다. 너무 바투 붙으면 칼을 찔러 넣을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거리를 좁히면 상대 역공에 당하기 쉽다.
일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방법은 아니다. 밀지도 당기지도 않는 상대방을 생각해보라, ‘어쩌란 거야?’라는 생각이 대번에 들고 밀어내든 당기든(대게 밀어내겠지만) 양단간에 결정을 내버릴 거다. 펜싱도 그렇다. 내가 원하는 거리를 상대가 그대로 둘리도 없거니와 공격 방식에 따라 거리도 달라져야 한다. 거리에 따라 공격 방식을 달리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적이긴 하다. 당연히 연애도 그렇지 않은가?
적절한 거리두기는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도 밀당과 닮았다. 자기객관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매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밀당을 할 수 있다. 내가 찍으면 누구든지 당길 수 있다고 믿는 과한 자신감은 상대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하고, 누구도 당길 수 없다는 밑바닥 자존감으론 평생 연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 내 팡트가 어느 정도 거리까진 가 닿는다거나, 이 정도 거리에선 마르셰로 한 번 또는 두 번 쫓아간 후에 팡트를 쏘아야 상대에게 닿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나를 알 정도가 되면 너를 아는 것도 시도해보면 좋다. 상대를 꼬시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담백한 ‘칼의 대화’로 알아가는 방식과 같은 원리다. 내가 A로 공격할 때 상대가 B로 막는다는 걸 알게 되면, A’로 공격을 시도해볼 수 있다. 상대를 알면 더 적절하게 밀고 당길 수 있다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픈 잔소리다.
문제는 첫인상을 좌우하는 3초라는 시간이 상대를 충분히 파악하기엔 너무 짧은 것처럼 3분이라는 시합 시간이 상대를 파악하기에 그리 길지 않다는 점 정도다. 아, 물론 이렇게 밀당의 원리를 줄줄 꾄다고 해서 내가 연애의 고수가 아니듯, 펜싱도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슬프게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