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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4. 심판

칼을 사고 장비를 하나씩 구비하기 시작할 즈음이 되면, 이제 어엿한 펜서가 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펜싱은 앙가르드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마르셰와 롱프르 사이의 공백만큼 양 허벅지에 근육도 웬만큼 붙었을 무렵이며, 팡트 뿐 아니라 마르셰 팡트 정도는 대충 흉내 낼 수준이 되고, 간혹 기회가 주어지는 연습 시합에서 나도 모르는 상처를 가슴팍과 허벅지에 안고 가는 경험을 몇 차례 했을 즈음이다.


이때가 되면 진짜 펜서가 되기 위한 다음 관문이 기다린다. 이 관문은 육체적 강인함보다 운동 센스나 어쩌면 동체 시력이 더 필요한 단계다. 바로 규칙을 숙지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서로를 마구 찌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펜싱은 간단한 듯 복잡한 규칙을 갖고 있다. 3개 종목이 모두 제각각 다른 규칙으로 진행되는데, 상대적으로 에페 규칙이 가장 쉽다. 동시타를 허용하고 전신이 유효면이기 때문에 고민 없이 찌르는데 집중하면 된다.


문제는 사브르와 플뢰레다. 몇 번 언급하긴 했는데, 프리오리테(priorité, 우선권)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양 선수가 동시에 서로를 찔렀다는 심판기 판정이 나오더라도 우선권을 가진 선수에게만 득점이 주어진다. 우선권 없이는 아무리 찔러도 이길 수 없다. 우선권은 먼저 공격 의사를 보인 선수에게 주어진다. 심판의 경기 시작 구령이 떨어지면 한 발이라도 먼저 나서거나 칼이라도 먼저 치켜들어야 우선권을 획득한다. 우선권을 빼앗긴 선수는 상대로부터 우선권을 빼앗아 오거나 공격을 당하지 않은 채 반격해야 득점할 수 있다.


말로 설명하면 쉬운데 이 우선권 규칙이 초보 펜서에겐 넘기 어려운 장벽 중 하나다. 분명 내게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과는 그것이 아닌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당연히 직접 경험해보는 거 만큼 장벽을 넘어서는데 좋은 방법도 없다. 시합을 통해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심판을 맡아 다른 시합을 판정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눈 깜빡할 새 없이 오고 가는 칼의 대화 속에서 마지막에 웃은 칼이 누구의 것인지를 가리는 게 심판의 역할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헛손질한 것까지 따져봐야 해서, 악! 정말 정신이 1도 없다.  


직접 시합을 뛸 때 보다 심판으로 나서면 좋은 점을 적어도 세 가지는 꼽을 수 있다. 제3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고, 동작 하나하나를 뜯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연습 시합이라곤 해도 오심을 할 순 없는 일이어서, 상당히 집중해서 시합을 봐야 하는 만큼 펜싱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진다. 물론 처음 심판을 볼 땐 감을 잡기가 쉽지 않다. 순식간에 우선권이 오고 가는 상황이 반복된다. 플뢰레는 칼끼리 부딪힘도 많아서 더 정신이 없다. 


모든 시합을 집중해서 심판을 봐야 하겠지만, 특히 판정이 까다로워서 초보 심판이 더 집중해야 할 시합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찬가지로 초보인 펜서들 간의 시합이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 않나. 규칙을 잘 모르는 초보들은 아무런 고민 없이, 용감하게 서로를 마구 찔러대기 바쁘다. 어디를, 왜 찔러야 하는지 아는 고수들의 다툼에는 그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를테면 대국이 끝나면 첫 수부터 마지막 수까지 내 것뿐 아니라 상대의 것까지 복기해내는 바둑 고수처럼 펜싱의 고수도 칼의 대화를 쉽게 복기해내곤 한다. 그들의 시합을 보고 있으면 장쯔이의 <와호장룡>이나 이연걸, 견자단의 <영웅>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검무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래서 고수들의 시합은 눈을 크게 뜨고 마지막 결정적 한 수만 잘 봐도 대충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초보들의 시합은 그저 ‘칼질’에 불과해서 규칙은 없고 의욕만 가득하다. 심판으로선 퍽이나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물론 고수, 프로들의 시합도 초보 심판이 판정하기 까다로운 순간이 있긴 하다. 초보 펜서의 시합과는 다른 의미에서 고수들 중에서도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선수들 간 시합이 초보 심판을 난감하게 한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보니 칼의 대화가 너무 많은데, 날카롭기까지 하다. 절묘한 타이밍에 상대방의 칼을 막아내면서 반격을 하질 않나, 그 반격을 다시 막고 반격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눈이 핑핑 도는 겨루기 한 순배가 지나고 결정적 한 수를 두 사람이 모두 둬버리면, 심판을 보던 내 시선은 저절로 스승님에게로 향한다. 누구의 득점인지 가려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수차례의 난감함과 간절함이 쌓이고 쌓인 후에야 내 눈에도 아름다운 검무가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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