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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6. 평발

지나온 5년도 균질한 시간은 아니었다. 2018년이 특히 그랬다. 그해는 직업적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해 2월 28일에는 약 7개월 전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 대구에 왔다.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이어진 촛불집회로 말미암아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펜싱을 시작했다. 억지인 거 안다. 다만, 촛불집회가 어떤 면에선 인생의 변곡점이 된 셈이니까, 닮았다고 퉁 쳐도 되지 않을까.     

 

2월 28일,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이던 2017년 4월 17일에 방문했던 곳을 똑같이 찾았다. 그 사이 그는 호칭이 ‘대통령 후보’에서 ‘후보’를 뗀 사람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지방의 쪼그만 인터넷 언론 기자였다. 그 탓 때문일까? 나는 그날에서야 호칭의 변화가 곧 신분의 변화라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7개월 전까지만 해도 ‘후보’의 바로 등 뒤에 붙어서 그의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지만, ‘후보’ 꼬리표를 뗀 2월 28일엔 근방 30미터 안으론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의 주변엔 허락된 사람들만 설 수 있었고, 나는 멀리서 카메라 렌즈를 도구 삼아 선하게 웃어 보이는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그로부터 두 달 쯤 뒤인 4월 27일엔 더 극적인 장면의 주인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북의 젊은 지도자와 손을 맞잡았고, 젊은 지도자의 손에 이끌려 금기의 선을 넘어서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 역시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스크린을 통해 환하게 웃는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방선거가 47일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몸담은 매체는 지방선거를 맞아 나름 의미 있는 기획 취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내 몸을 살찌운 촛불집회와 그로인해 대통령이 된 이의 등장이 내가 사는 이곳에도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살펴보는 게 취재의 목표였다. 취재는 4월부터 5월말까지 이어졌다. ‘뻘건맛’이란 타이틀 아래, 나와 동료 기자들은 경북의 곳곳을 돌며 시민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그 탓에 한 달 넘게 검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 취재는 한 달 동안 운동 금지 이상의 결과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취재는 경북 곳곳을 많이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루에 많으면 3~4시간을 걸었다. 이때까지도 촛불집회의 후유증이 남긴 체중은 크게 줄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걷는 것에도 진심을 다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는지 모른다. 펜싱으로 인해 운동량이 늘어나면서 축적된 피로 때문이었는지 기획 취재가 끝나고 얼마 못 가 발바닥에 탈이 나버린 거다. 

     

선거가 끝나고 이틀 뒤인 6월 15일, 피스트에 복귀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 6월 22일 새벽, 나는 왼쪽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잠에서 깼다. 제대로 딛고 서는 것도 힘들었다. 거의 기듯하며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끙끙 새벽을 앓다가, 아침 해가 뜨자마자 병원을 찾았다. 나는 잠결에 발길질을 심하게 하다가 뭔가를 걷어차서 뼈라도 다친 줄 알았다. 그런데 병원 진단은 뜻밖이었다. 족저근막염이라고 했다. 족저근막염이 이리도 아픈 병인진 그때 처음 알았다.     

병을 앓고 난 다음에 알았지만 내 발은 펜싱이랑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 발은 평발이다. 극히 소수이지만 평발이 심각한 경우엔 군대도 면제된다. 나는 평발 탓에 입대 신검에서 3급을 받았다. 평발이 아닌 사람은 가끔 내 발을 보고 깜짝깜짝 놀란다. ‘이렇게 평평하다고? 하면서.’ 평발은 평발이 아닌 사람의 발바닥과 달리 아치가 그려지지 않는다. 유연성이냐 강직성이냐에 따라서 앉아 있을 땐 아치가 유지되는 평발(유연성)도 있지만, 나는 강직성에 가깝다. 앉으나 서나 평평하다.  

   

아치는 족저근막과 순망치한 같은 관계다. 족저근막은 발뒤꿈치부터 5개 발가락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섬유띠인데, 아치를 유지하고 충격을 흡수해주는 역할을 한다. 족저근막으로 아치가 유지되면 또 그만큼 족저근막에 전해지는 충격도 적다. 하지만 평발은 아치가 거의 없어서 외부 충격을 그대로 족저근막에 전달한다. 이런 충격이 반복적으로 전달되면 근막에 염증이 생긴다. 평발인 내가 펜싱처럼 발 구르기를 많이 해서 발바닥에 부담을 주는 운동을 많이 하면 족저근막염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족저근막염이 생기기 딱 좋은 조건들이 만났으니 발바닥이 버티지 못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더구나 이 무렵엔 기획 취재 때문에 많이 걷기도 했으니 100%.   

   

그 길로 약 다섯 달 동안 칼을 잡지 못했다. 매주 3회 퇴근 후 즐기던 즐거움이 다섯 달이나 사라진 셈이다. 그나마 한 달 넘는 취재의 결과물이 좋은 평가를 받아 생애 첫 기자상을 받은 덕에 다섯 달의 강제 휴식을 가까스로 수긍할 수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고, 호사다마란 말이 참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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