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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을 든 달타냥 Oct 30. 2022

[펜싱은 처음이라] 17. 조선의 '쿠도히나'를 찾아서

20세기 초반, 조선의 어느 빈관(호텔) 안 정원, 흰색 도복과 마스크를 갖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칼을 뻗는다. 몇 차례의 합이 이뤄지고, 흰 도복 아래 짙은 푸른색 치마를 갖춰 입은 여성이 칼을 뻗으며 날카롭게 상대의 가슴을 향해 뛰어든다. 팡트! 푸른 치마가 우아하게 펄럭인다. 가슴을 찔린 상대가 마스크를 벗어든다. 해사하게 생긴 백인 남자다. “히나, 오늘 왜 이렇게 공격적이야?” 짙게 푸른 치마를 입은 상대도 마스크를 벗어든다. 우아하게 생긴 동양인 여자다. “내가 펜싱을 왜 좋아하는지 알아? 급소를 노려 찌르고, 짧고 정확하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어서야.”, “맞아, 그렇지만 상대도 너랑 같은 칼을 들었단 걸 알아야지. 네가 거칠고 흐트러질수록 네 빈틈 또한 드러나는거야. 우아함을 잃지 마.” 그러자 동양인 여자는 차갑게 조선말을 내뱉는다. “그러고 싶은데, 우아하게 안 두네. 세상이”      


▲20세기 초반 조선에서 펜싱을 하는 여성이라니!                                          


하아, 이거다! 족저근막염으로 검을 놓아야 했던 다섯 달은 자칫하면 무료한 밤과 밤으로 채워질 뻔했지만, 다행히 다른 즐거움이 찾아왔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다. 그해 7월부터 방영된 드라마는 소재나 완성도도 매력적이었지만, 배우 김민정을 보는 즐거움이 컸다. 무엇보다 그가 극에서 수준급의 펜서라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반 조선에서 펜싱을 하는 여성이라니! 가끔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우아한 팡트는 ‘훅’하고 나를 매료시켰다. 그가 펜싱을 좋아하는 이유도 가슴에 팍 와닿았다. ‘짧고 정확한 공격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킨다’라니. 나는 왜 이렇게 표현하지 못할까? 역시 김은숙 작가구나! 반가움과 부러움으로 주말 저녁을 기다렸다.     


<미스터 션샤인>을 계기로 20세기 초반 무렵 펜싱은 유럽을 무대로 해서 각광받는 레저였단 사실을 알게 됐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 플뢰레와 사브르가 정식 종목을 채택됐고,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에페도 추가됐다. 산업화의 최정점에 서서 제국을 만들어가던 유럽이야 그렇다 치지만, 여전히 개화기에 있던 조선에도 펜싱이? 의문이 들었지만, 치파오를 입고 상대를 향해 칼을 뻗는 그의 아름다운 자태에서 무엇인들 어떠랴 싶어졌다.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펜싱이 도입된 건 1946년이다. 일본에 유학하던 김창환 등은 1935년, 일본에 체류 중이던 체코인으로부터 전문적인 펜싱 기술을 배웠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온 김창환, 윤항섭, 조득준, 송영창 등은 1946년 6월 고려펜싱구락부를 조직해서 서울 충무로 2가 ‘세기사운동구점’ 옥상에서 펜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미스터 션샤인> 속 김민정의 펜싱은 적어도 40년은 이른 조선의 펜싱인 셈인데, 아무튼.     


배우 김민정이 <미스터 션샤인>에서 펜싱을 선보인 것을 기화로 펜싱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된 건 어쩌면 직업적 궁금증의 발호일지도 모른다. 특히 여자 펜싱, ‘실제 역사 속 김민정은 언제쯤 등장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민정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쿠도 히나’라는 일본인으로 살았지만, 이 또한 아무튼!    

  

가장 먼저 책을 찾아봤다. 펜싱 자세나 기술 교육을 위한 책은 여럿 출간된 것이 있지만 펜싱 역사를 톺아주는 건 찾기 힘들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연세대 펜싱 동아리가 자신들의 과거를 기록한 책을 출간한 적 있지만 우리나라 펜싱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볼 순 없었다. 논문도 뒤적거렸지만 역시 김창환을 비롯한 남성 중심의 간략한 약사 수준에 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 사실 펜싱에서도 여성은  오랫동안 차별받아왔다. 1896년 첫 올림픽부터 펜싱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긴 했지만, 남자 종목에 한정됐다. 올림픽 자체가 애초에 여성을 배제한 채 시작되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성도 올림픽 경기장에 마련된 피스트 위에 설 수 있게 된 건 1924년에 와서부터다. 그해 펜싱 종주국 프랑스 파리에서 또다시 열린 올림픽에서 여자 플뢰레 개인전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남자는 3개 종목 모두 개인전뿐 아니라 단체전까지 열린 걸 고려하면 이때까지도 완전히 평등한 조치가 이뤄진 건 아니다. 남자는 한 선수가 에페 개인전을 제외하고 5개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는 일도 있었지만 여성은 모든 펜싱 종목이 정식으로 채택된 게 2008년에 와서다. 1924년 이후 84년 만이라니, 똥고집도 대단하구나 싶어진다.

     

그렇다고 궁금증 풀기를 멈출 순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옛날 신문을 뒤져서 실마리를 찾았다. 1933년 7월 11일자 <조선일보> 보도다. ‘인기 끌은 여자 펜싱’이라는 제목의 보도는 인천에서 열린 무도대회 종목 중 여자 펜싱도 있었고, 관중들의 흥미를 끌었다는 게 골자다. 해당 보도에는 라여운, 최월례 두 여성 펜서가 소개된다. 어쩌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펜서, ‘김민정’들인 셈이다. 아쉬운 점은 두 사람의 이름이 이후에는 펜싱과 관련해 확인되지 않는다는 거다.    

 

여기까지 찾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더 들었다. 펜싱 관련 문헌에서는 우리나라에 처음 펜싱이 소개된 것이 1946년이라고 쓰고 있다. 중추적 역할을 한 ‘김창환’은 사실상 우리나라 ‘펜싱의 아버지’처럼 소개된다. 그런데 그보다 13년이나 앞선 1933년에 어떻게 여자 펜싱 경기가 성사되었을까? 1933년에 여자 펜싱 경기가 성사될 정도로 만들어져 있던 펜싱 저변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본능적, 아니 직업적으로 추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며칠에 거쳐 옛 기사들을 다시 뒤졌고,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동아일보> 1932년 10월 6일자에서 흥미로운 뉴스를 발견했다. 조선 땅, 한반도에서 처음 펜싱이 소개된 게 1932년이라는 뉴스였다. ‘조선에 처음일, 펜싱술 지도’라는 제목의 보도를 보면, ‘조선무도관’에서 이전까지 없던 운동부를 신설했는데 그중에는 펜싱부도 포함됐다. 보도는 “조선에서 펜싱을 지도하는 것은 이것이 교시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조선무도관은 우리나라 검도와 유도의 선구자로 알려진 강낙원 씨가 1921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도장이다. 검도와 유도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는 펜싱도 좀 할 줄 알았던지, 1933년 <동아일보>의 무도관 증설을 알리는 보도에서 펜싱부 사범으로도 소개된다. 1932년에 처음 조선에서 펜싱술을 지도했던 것도 어쩌면 그였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지점이다.      


펜싱과 관련해서 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확인되지 않는데, 펜싱보다 검도와 유도 등에 더 힘을 쏟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쩌면 김창환 등이 1946년에 처음 우리나라에 펜싱을 소개했다는 평가는 강낙원이 검도와 유도에 집중하면서 펜싱의 맥이 끊어졌고, 오늘날 펜싱계 저변이 김창환 등으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창환은 우리나라 펜싱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어서 그의 이름을 딴 대회가 올해(2022년)로 27회째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강낙원은 친일파로도 알려진 인물이니 펜싱계에서 굳이 연을 가져갈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는 3.1운동 이후 여성들이 꾸린 비밀 독립 결사 단체 ‘혈성단애국부인회’ 주축이었던 오현주와 결혼했는데, 배우자의 인생마저도 친일의 길로 이끄는 만행을 저질렀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부부가 함께 체포되기도 했지만, 반민특위의 해체로 처벌은 면했다고 한다. 쿠도 히나(김민정의 배역)로부터 시작된 의문은 친일파로 변절한 우리나라 첫 펜싱 사범에게까지 가 닿았다. 어쩌면 절묘한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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