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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나라, 네덜란드

by 이 은

다음 날, 우리는 유로스타를 타러 길을 나섰다. 어제 날씨가 쌀쌀했던 탓인지 감기 기운이 들었다. 이미 무거운 짐이 있는데 몸까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역에 도착한 나와 주디언니는 마트에 들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장차 4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트에는 눈에 띄는 음식도, 입맛도 없었기에 대충 샌드위치와 요거트를 구매했다. 유로스타에 탑승 후 짐 보관함에 캐리어를 놓고 자물쇠를 걸어놨다. 유럽에서는 캐리어도 도난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조금 유난인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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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동안 잠에 빠졌다. 영국에서 나름 여유 있는 시간도 보냈는데 아무래도 많이 걷고 움직이다 보니까 체력이 떨어졌나 보다. 중간에 잠시 일어나 샌드위치와 요거트를 먹고, 휴대전화를 보다가 다시 잠에 들고 반복이었다.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KTX도 길게 느껴지는데, 4시간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그래도 결국 시간은 흘렀다. 이제 곧 암스테르담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짐 보관함에서 자물쇠 비밀번호를 누르고 캐리어를 꺼냈다. 잔뜩 지친 얼굴을 보고 주디언니는 걱정했다. 그래도 지하철을 타면 숙소까지 금방 도착했기 때문에 힘을 다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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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숙소는 한인 노부부가 운영하는 쉐어 하우스였다. 다행히 남자 사장님이 지하철 역으로 데리러 와주셔서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포근한 느낌이 나는 입구를 들어서자 여자 사장님은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며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안내를 따라 안쪽 방으로 향했고 침대와 테이블이 있는 아담한 방에 들어섰다. 숙소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주디언니와 무얼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는 시내에 나가기로 했는데, 도저히 체력이 안 돼서 나는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주디언니만 혼자 시내를 보내는 게 너무 미안하고 아쉬웠다. 하지만 무리를 했다가는 앞으로의 여행을 소화하지 못할까 봐 쉼을 택했다. 주디언니가 나간 사이에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컵라면을 꺼내 한 컵을 뚝딱 비웠다. 그리고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컨디션을 회복한 채로 기상했다. "언니 오늘은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에 언니에게 말을 건넸다. 언니는 체력 관리를 잘하라며 북돋아줬다. 그리고 여자 사장님이 차려주신 아침, 그것도 한식이었기에 우리는 오늘 최대의 체력을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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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워낙 잘 먹지 못한 탓에 입이 짧은 주디언니도, 원래 한식을 좋아하는 나도 반찬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그렇게 오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다시 또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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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확실히 영국과 다른 느낌이었다. 풍경도 다르고, 건물도 달랐다. 특히 런던에서는 트램을 보지 못했는데, 자동차처럼 도로 위를 다니는 기차가 너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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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트램을 타고 시내를 구경했다. 우선 카페에 들러 페스츄리를 먹었다. 심지어 아이스 음료가 있어서 아이스커피를 시켜 먹었다. 따뜻한 라테가 아무리 좋다지만 한국인은 역시 아이스 음료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주디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국 노래가 들려 신기했다. 주변을 돌아보며 사람 구경도 잔뜩 했다.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라테를 마시며 생각에 잠기셨는데, 유치원 때 만났던 산타 할아버지를 닮으셔서 너무 반가웠다.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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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카페 옆 공립도서관을 갔다. 건물 외부와 내부 모두 상당한 인테리어였다. 공립도서관이라 입장료가 없었는데, 너무 멋진 건물이라 무료라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주 고요한 분위기 속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책이라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책을 읽었다간 잠이 들 수도 있기 때문에 어린이 도서관 쪽에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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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보던 비디오테이프가 한가득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101마리 달마시안, 밤비, 스펀지밥 등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이 넘쳐났다. 1시간이 넘도록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다음은 중앙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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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건물은 누군가 그림으로 그린 듯이 조금 삐뚤빼뚤한 느낌이다. 더 신기한 건 건물끼리 촘촘하게 붙어 있다는 거다. 어떤 건물은 살짝 기울어져 있고, 또 어떤 건물은 일자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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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구경을 하다가 운하가 있는 다리를 건너게 됐다. 동네 곳곳에 운하가 있다는 게 참 운치 있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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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에 줄비한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어떤 걸 시킬까 고민하면서 옆 테이블을 보는데 글쎄 한 사람당 피자 한 판씩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굉장히 신선한 모습이었다. "언니 우리도 저렇게 먹어볼까?"라고 하자 주디언니는 "아마 우리 둘 다 절대 다 못 먹을걸."이라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언니의 대답에 웃으며 결국 한국에서 먹듯이 피자와 파스타를 시켜 나눠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우리는 트램을 타고 오늘 일정 중 가장 중요한 곳을 갔다. 바로 <반 고흐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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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웅장한 건물에서 전시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손에 꼽는 네덜란드 출신 인물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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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반 고흐의 작품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책으로, TV로만 보던 그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눈이 동그래졌다.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는 오히려 병을 앓으며 실패와 낙담의 삶을 살아갔지만,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빛을 발했다. 작품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대체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동안 괴롭다가 죽고 나서 선망받는 삶을 마냥 좋게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면 고흐가 살아있을 때 행복했던 게 낫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본래 생각이 많은 편인데 더 심오한 영역을 떠올리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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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떠나는 여행은 처음 겪는 환경과 문화 속에서 새로운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닌 타인이 사는 삶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누군가 살아왔던 인생을 상상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어쩌면 나 또한 이 여행을 떠남으로써 인생을 알아가고 배우는 시간을 겪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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