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떠나는 기차를 탑승했다. 빨간색 좌석처럼 함께 떠나는 이들도 마음이 붕 떴는지 가는 내내 노래를 틀어놓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잠에 들 순 없었다. 4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주디언니와 프랑스 일정을 확인했다. 런던만큼 오래 머물고, 이동해야 하는 순간이 많기 때문에 꼼꼼하게 볼 필요가 있었다.
아빠 품에 안겨 프랑스로 떠나는 아기도 마냥 신나 보였다. 우리는 아기와 종종 눈을 맞추며 장난을 쳤다. 덕분에 가는 동안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금방 흘렀다. 하지만 기차가 연착된 탓에 저녁 7시가 넘어서야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밤에는 위험할 수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악명이 높기로 소문난 파리 지하철은 꽤 긴장됐다. 문이 열릴 때마다 휴대폰을 숨겼고, 캐리어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심지어 공간도 좁아 부딪히지 않기 위해 무지 애썼다. 주디언니 옆에 꼭 붙어 있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확인하다 보니 드디어 스트라스부르 세인트 데니스 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숙소 주인분이 마중을 나와 걱정을 한시름 내려놓았다. 차로 오는 줄 알고 살짝 설렜지만, 걸어서 왔다며 해맑은 미소로 우릴 반겨주었다. 10분 정도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2층짜리 주택이었고 1층은 우리가, 2층은 유학생들이 산다고 했다. "이제 편하게 쉬고 내일 일정도 잘 소화해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저녁도 차려놨으니 맛있게 먹어요~"라는 말을 남긴 채 주인분은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주인분이 엄청 화려한 저녁상을 차려놓고, 와인까지 준비해 놓은 게 아닌가.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몰라 프랑스에서 주로 먹는 재료를 준비해 놨다고 했다. 정말 감동받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부터 환대받는 나날들이 이어지는 게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주인분이 유학생들과 다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일정도 맞지 않고, 우리가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주디언니와 둘이 오붓하게 와인 한 잔 하며 프랑스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프랑스 숙소는 취사는 물론, 세탁도 가능했고 욕실도 따로 있어서 매우 편리했다. 장기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건 참 행운처럼 느껴진다.
잠자리도 편해서 푹 자고 일어나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우리는 어제 먹고 남은 빵과 감자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시내로 갔다.
미리 예약한 '파리 뮤지엄 패스'를 수령해 루브르 박물관에 왔다. 말로만 듣던 루브르 건물은 아름다웠고 웅장했다. 유리 피라미드도 굉장히 압도적인 느낌을 줬다. 건물과 조형물에 정신이 팔리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내부에 있는 작품을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시 빠르게 정신을 차린 후 안으로 향했다.
모든 작품이 사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세히 그려졌다. 관람하는 내내 왜 시간이 부족한지 알게 됐다. 보고 싶은 작품들이 즐비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때문에 루브르에 왔는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수많은 인파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음 편히 관람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눈과 사진 속에 꾹 담은 채 이동했다.
2시간이 채 안 됐는데 조금 지쳤다. 오늘은 가야 할 곳이 많았기에 루브르에서의 시간은 마무리하고, '퐁피두 센터'로 이동했다.
건물이 정말 특이했다. 에스컬레이터마저도 독특하게 연출해 놨다. 한 번쯤은 와볼 법 하지만, 현재보다 옛 것을 더 좋아하는 나에겐 큰 놀라움을 주진 못했다. 내부에 있는 현대 미술관을 관람했다. 퐁피두 건물처럼 신선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렇게 한 층, 한 층 올라가다가 옥상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려는데 주디언니가 불렀다. "여기로 와 봐. 에펠탑 보인다!" 나는 "뭐? 에펠탑?!"을 외치며 화들짝 놀랐다. 옥상 끝을 향해 가보니 정말로 에펠탑이 보였다.
그 당시 썼던 글이다. 나는 정말,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몰랐다. 건물 구경을 더 하겠다는 주디언니에게 다녀오라며 혼자 앉아 멍하니 에펠탑을 바라봤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기분이 생생하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우리는 성당 한 곳을 들리고, 센 강을 거닐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코로나 시절, 한국에서 직장에 찌들고 있던 나와는 달리 고등학교 친구 라영이는 센 강을 걸으며 산책하고 있다고 했다. 라영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너무 멋진 삶이다. 나도 언젠간 저기 갈 날이 올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드디어 이곳에 와있다니. 꿈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마음에 품던 꿈을 언젠간 이루는 날이 늘 다가온다. 그게 한 달이든, 1년이든, 3년이든 말이다. 참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꿈도 잘 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둡고 슬픈 꿈이 아닌, 밝고 행복한 꿈으로 말이다.
한참을 걷고 나서 거리에 펼쳐진 카페에 갔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셨다. 꽉 찬 일정 속에 틈틈이 갖는 이 여유가 좋았다. 다시 걷고, 다시 느끼고, 다시 생각할 힘이 생기는 시간이다. 주디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계속해서 대화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점점 그 순간이 소중해져 갔다.
그다음은 개선문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에펠탑을 보러 온 것이기도 하다. 정말 높은 저곳을 계단으로 걸어서 올라갔다. 우리뿐만 아니라 계단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헉헉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올라가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또 하라면 또 해야지.'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낮에 본 에펠탑과는 또 달랐다. 붉은 노을 속에 우뚝 솟아있는 에펠탑의 아름다움,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 마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쏟아지는 인파 속에도 괜찮았다. 황홀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래 맞아. 진짜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