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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눈이 쌓여 있는 곳, 융프라우

by 이 은

도미토리에서 보내는 밤은 꽤 낯설었다.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이틀 후면 헤어질 사이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도만 나눌 뿐. 잠도 푹 못 자고 뒤척이다 겨우 아침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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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융프라우로 향했다. 전날 미리 패스권을 사둔 덕에 쉽게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난 여정은 철저함이 자주 필요하곤 하다. 꼼꼼한 성격임에도 처음 유럽에 온 탓에 헷갈리고 어려운 게 많은데, 두 번째 유럽여행을 온 주디언니 덕분에 여러 과정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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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으로 펼쳐진 풍경은 정말 예술이었다. 푸른 초원 위에 세워진 집을 보며 "저긴 누가 살까? 오고 가는 건 힘들어도 저런 데서 살면 엄청 고즈넉하겠다."라고 이야기했다. 점점 고산지대로 향하자 귀가 먹먹해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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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에 도착했다. 2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이동하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겨울왕국이었다. 산이 눈으로 뒤덮여 있는 건 물론, 우리가 밟는 땅도 눈이 쌓여 있었다. 하필 이날 멋을 낸다고 플랫슈즈를 신었는데, 정말 후회스러웠다. 발이 너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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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곳에 오다니." 스위스를 검색하면 나오는 풍경 중 하나가 이 포토존이었다. 눈이 펼쳐진 풍경에 스위스 국기가 흩날리는 모습이라니. 이곳저곳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탓에 예쁜 사진은 찍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왔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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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는 또 얼마나 좋던지. 맑은 공기를 쉴 새 없이 마셨다. 한국에 돌아가면 미세먼지 속에 뒤덮여 살아야 하는데, 이곳의 공기는 마치 나에게 선물 같았다. 그리고 9월에 만지는 눈은 참 신기했다. 손이 시린 걸 꾹 참고 주디언니와 눈을 뭉쳐 작은 눈사람도 만들었다. 너무너무 추웠지만, 그만큼 값진 경험이었다. 이곳에 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차가운 눈을 만지고서야 조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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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실내로 들어왔다. 우리가 끊은 티켓에는 한국의 신라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득 찬 사람들 사이에 겨우 자리를 잡고, 퉁퉁 분 라면을 먹었다. 불어도 맛있었다. 특히 추운 곳에 있다가 먹으니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국물까지 마신 건 참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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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념품샵을 조금 구경하다가 다시 인터라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표를 확인받고 열차에 앉아 기다리는데 초콜릿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융프라우 풍경이 담긴 초콜릿이었다. 너무 예쁜 기념품이 될 것 같아 먹지 않고 가방에 잘 보관했다. 오래오래 가지고 있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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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에 한 마을도 들렸다. 아까 올라가던 길에 보던 그곳 같았다. 마을에는 집들이 줄 서있듯 세워져 있었고, 관광객들이 주를 이뤘다. 우리나라 시골처럼 참 한적했다.


한적한 곳에 있으니 든 생각은 '한국에서 너무 바쁘게 살아온 건 아닐까?'였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살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한적한 게 오히려 이상하고 어색한 일이기에 유럽에 왔을 때 굉장히 신기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한숨 돌리며 차분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IMG_1596.JPG 숙소를 지키는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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