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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무디 Jun 05. 2022

남편의 노트

나는 그의 적는 습성을 매우 사랑한다.



남편과 나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상황이란 경제적인 것부터 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앞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들 등 주제는 매번 다양하게 다룬다. 남편은 노트에 이것저것 적으며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종잇장에 머릿속의 생각들 (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재정상황에 대한)을 적어내며 중간중간 ‘자기 우리 지금 고정 지출이 00이야.’ ‘우리가 세계여행을 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돼.’라는 식으로 보고하듯 알려준다.


생각해보면 연애할 초반부터 줄곧 그래 왔다. 그 당시 우리는 소위 ‘여행에 미친’ 사람들의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서 뉴질랜드니 유럽이니 하며, 이불만한 도화지에 연도별 여행 계획을 그리는 식으로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큰 도화지나 A4용지를 깔고선 펜을 쥐고 너와 나의 머릿속을 다 쏟아내던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이미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적는 습성을 매우 사랑한다. 생각은 많고 행동은 조심스러운 나는 자주 정리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종종 정리라는 타이틀에 갇혀 허둥바둥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톡톡히 꾀고 있는 남편은 복잡한 걸 해결해주는 만능 로봇처럼 깔끔하고 명료하게 그 어수선함을 잠재워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참 복도 많지, 이런 로봇 같은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정리 습성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것이다.


고작 스물셋에서 넷의 나이에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두려울 것 없던 시절, 가진 것 없는 조막만 한 손으로 우린 야무지게도 살아내었다. 한 번은 네덕 또 한 번은 내덕으로 좋은 시기에 좋은 기회도 잡아보며 결혼이라는 관문까지 거쳐온 우린 그만큼이나 각별한 사이다. 몇 년간을 거의 24시간 붙어 살아왔어도, 앞으로도 다름없이 이렇게 같이할 수 있는 것 위주로 계획을 한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나의 가족이며 제일 믿음직스러운 내편. 말 그대로 내 삶이며 내가 가진 전부인 사람이다.


발리 여행을 하며 이전에 꿈꿔뒀던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조심스레 꺼내보곤 이내 열심히 이것저것을 적는 남편. 크고 작은 일들을 시작하기 전부터 몇 수 앞까지는 예상해 보고 타산을 맞추는 사람이다. 기준에 부합하는 타산이 나오면 더 계획해보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손해가 나는 선택이라면 깔끔하게 손을 놓는다. 이상을 꿈꾸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내가 어떤 작은 바람이라도 한번 꺼내 놓는 날이면 이뤄주기 위해 샅샅이 계획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노트에 적힌 본인을 꼭 빼닮은 글씨들의 나열에서 나는 늘 우리의 미래를 본다. 분명한 건 꼭 그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결국은 우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는 사랑하는 마음에 존경하는 마음을 얹으면 함께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진다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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