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고 괜찮지 않을까? 와 그럴 리가 없다.
세상에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명쾌한 진리가 있다. 하지만 혹시 이번에는 횡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 진리를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매일 걸어 다니는 것도 지겨워지고, 차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껏 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때, 하루 8천 원이라는 가격표를 내미는 렌터카 회사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나는 그 가격에 약간의 불편함과 예측 불가능성이 포함돼 있음을 각오했던 것 같다. 실은 이미 몇 번 겪어보기도 했다. 지난번에는 직원의 실수로 30분을 허비하기도 했다. 반납된 차는 청소하고 키를 카운터에 반납하는 게 정석일 텐데, 현장 직원이 키를 차에 그냥 두는 바람에 카운터 직원이 키를 찾지 못해 한참을 기다린 끝에 다른 차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바꾼 차는 내비게이션 고정대가 부러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알리자 남자 직원은 “그럴 리가 없는데”라며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말했다. 다행히 차를 타기 전 찍어둔 사진들이 있어 그 사진들을 보여주고 나서야 누명을 벗었지만, 상한 기분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이번엔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차를 배정받아 내심 기뻤다. 하지만 이 차에는 기본 장착되는 아이나비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싸니까 이해하자.’ 나는 이 마법의 주문으로 20분을 기다렸다. 남는 내비 아무거 나라도 달아달라는 내 요청에 느릿느릿 나타난 직원은 역시나 지난번의 그 남자였다. 그는 여전히 “그럴 리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 차의 네비가 내장형인지 확인하는 듯 디스플레이를 조작하며 단체 카톡방에 연신 사진과 메시지만 찍어 보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먼저 말했다. “앞유리에 내비게이션을 붙였다 뗀 자국이 있지 않습니까. 그냥 남는 거 하나 가져다주세요.” 하지만 직원은 네비를 누가 뗐는지도, 여분의 네비가 있는지도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럼 당신이 아는 건 대체 뭡니까?” 이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 말을 용케 참아냈고 그런 내 자신이 속으로 약간 대견했다.
아무튼 이런 나의 노력에도 고난은 끝나지 않고 계속 나를 찾아왔다. 내비게이션 때문에 교체받은 더 구형의 스파크를 몰아 서귀포 시내 쪽으로 가기 위해 성판악으로 향하는 길. 평소와 달리 차들이 길게 늘어선 이유가 궁금해질 무렵 경찰들의 불시 주간 음주 단속 현장이 나타났다. 요즘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니 거리낄 것 없었지만, 하필 빨리 가서 알바 시작 전 잠시라도 쉬고 싶은 이때 불시 주간 음주 단속이라니, 조금은 짜증 나고 신경질적인 숨을 ‘후’ 내뱉고 나서야 길은 다시 열렸다.
그런데 한라산 오르막길에서 차가 이상했다. RPM 게이지는 5천을 넘기며 엔진이 비명을 질렀지만 속도계는 좀처럼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탁 치는 변속감과 함께 차가 전진했고, 엔진이 있는 앞쪽 발밑에서는 뜨거운 열기까지 느껴졌다. 급히 차를 갓길에 세우고 구글과 제미나이로 검색해 보니 ‘스파크 CVT 미션 슬립’ 현상에 대한 수많은 사례가 나왔다. 주로 8만~10만 km에서 발생한다는 글을 읽고 계기판을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주행거리는 정확히 10만 km를 갓 넘기고 있었다. 이 차의 심장인 CVT엔진 미션 초도 부품은 이미 수명을 다한 셈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산 중턱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역시 안 되겠어’라는 판단에 결국 운전대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까 음주 단속을 하던 지점을 다시 지날 때, 경찰관은 나를 알아본 건지 별다른 검문 없이 손짓으로 길을 열어주었다. 그 무심한 통과 신호에 그가 나의 상황을 알고 편의를 봐준 건가 하는 생각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마지막 고난은 아라동과 제주시청 근처에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긴 차들의 행렬 속에서 멈추고 서기를 반복하는 동안, 차는 언제 완전히 멈춰버릴지 모르는, 아니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지는 예상할 수 없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속도는 붙지 않고 엔진 소리만 요란해지는 순간들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영상을 찍는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신호등과 내리막 경사로, 그리고 늘어선 차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렌터카 회사에 돌아와 증상을 설명하자, 렌터카회사의 짜증스러운 과정은 다시 반복됐다. “직원이 점검할 테니 차에서 기다리세요.” 카운터 직원의 무표정한 말투에 이어, 아까 그 남자 직원이 와서 시운전을 했다. 그는 RPM을 6천까지 올리며 공항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와서는 어처구니없는 답을 내놓았다. “기어 변속 시 충격이 있긴 한데, 이 차가 원래 힘이 없어요.”
그 순간 내가 마주한 것은 자동차의 결함이 아닌, ‘인간’이라는 더 이해하기 힘든 변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고 고객의 경험을 개인의 느낌 탓으로 돌리는 그의 태도에 무력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이전에 렌트했던 다른 스파크는 이런 증상이 없었다며 항의했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싸움이라기보다, 내 경험을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결국 스마트키도 아닌, USB 충전 단자도 고장 난 더 낡은 차를 받았다. 다행히 차는 잘 굴러갔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차라리 스마트폰을 내비로 쓰면서 내비가 없던 첫 차를 그냥 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기분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 여자를 얻었는데 그 삶이 더 고단할 때 이런 심정일까 하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결과적으로는 나의 작은 불평이 더 큰 불행을 불러온 셈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문제의 시작은 ‘혹시나’ 하는 내 사행심이었을지 모른다. 8천 원이라는 달콤함에 취해 몇 번의 이상 신호를 외면한 대가였다.
9년이나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제주라는 이 낯선 땅에서 마주한 이해할 수 없는 완고함은 어쩌면 내 안의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이 거울처럼 비친 모습은 아니었을까. 결국 그날 나는 저렴한 가격으로 차를 빌렸지만, 시간과 감정, 그리고 안전에 대한 불신이라는 훨씬 더 비싼 비용을 치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