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도로를 걷다가
제주도 해안도로 첫 도보여행의 기억
제주도의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첫 도보 여행. 그 길은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무채색의 캔버스 같던 일상에 여행은 다채로운 색을 입히며 잠자던 감각을 일깨웠다. 마치 흑백 영화에 색이 입혀지듯, 세상이 다채롭게 변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문득문득 새로운 자극과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 속에서 '아, 나는 살아있구나!' 하는 생생한 감각을 느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마주친 한 아주머니는 다가와 내게 물었다. "왜 걷고 있어요?" 솔직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도 많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도 되고… 불안함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걷고 있다고 답했다. 아주머니의 눈빛에는 옳다쿠나 하는 생동감이 맴돌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잘 되겠죠. 살아보니 인생 별거 없더라고요. 화이팅!"이라는 뻔하고 공허한 위로였다. 그 순간, 그 말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불편한지 깨달았다. 아주머니의 값싼 동정은 나를 불쌍한 존재로 낙인찍어버리고, 내가 정말로 잘될지 못될지는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의 우월감으로 인한 만족감만 흡족히 느끼기 위해 나에게 싸구려 동정을 쏟아낸 것이었다.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 외국계 회사까지 거치며 나름 치열하게 살아온 내게 아주머니의 동정은 공감보다는 잘난 체로 다가왔다. 비약해서 비유해 보자면 칸트에게 동네 할머니가 철학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훈계하는 듯한 부조화였다. (내가 칸트 정도의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로 잘 알고 있다. 비난 마시길. 이런 비유를 든 이유는 2017년쯤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고, 2024년 현재의 나는 식당마저 실패해 신용불량자 직전인지라,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꽤 느끼고 있다.)
그날 이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걷고 있다"라고 답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동정을 피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공자께서 이야기하시길 길을 걷다 보면 세 사람 중 한 명은 꼭 스승이 있다지만, 무례함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면교사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을 배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그때, 나에게 동정을 베푸는 사람들의 무례함에 화가 났다. 그들은 그저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나에게 동정을 흩뿌렸다. 마치 젖몸살이 난 동물이 아무 곳에나 젖을 뿌려대는 것처럼, 그들의 동정은 내 얼굴에 불쾌하게 튀었다. 젖은 조심스레 짜서 유유로 마셔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함부로 뿌려댄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꽤 괜찮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어쩌면 그들은 내게 '나는 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그런 싸구려 동정을 흩뿌리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만든 '좋은 사람'이라는 포장지 안에 갇혀, 그 안에서 흡족해하는 것은 아닐까?
이 여행은 내게 깨달음을 안겨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존재임을 확인했고,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지혜도 얻었다. 동시에 타인의 섣부른 동정과 그 이면에 숨겨진 욕망을 마주하며 인간관계에 대한 씁쓸한 단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나는 여행을 통해, 혹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느끼며 생각해 볼 것이다. 무례한 동정에 굴하지 않고, 나는 타인에게 진정한 공감과 이해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나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