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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커뮤니티를 하다가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과 변화하는 모든 것

by Daga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다룬 글을 보았다. 그래서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어떤 내용인지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가 제기한 역설로, 테세우스의 배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래된 나무판자를 하나씩 교체하다가 결국 모든 판자가 새것으로 교체되었을 때, 이 배가 여전히 '처음 그 배'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더 나아가, 만약 교체된 원래의 판자를 모아서 다시 조립하면, 그것도 테세우스의 배일까? 그렇다면 두 개의 테세우스의 배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배의 모든 부품이 교체되면 그 배는 원래의 배인가, 아닌가?"


글쓴이는 사람의 세포도 7년이면 완전히 교체된다는데, 그러면 다시 태어난 것인가?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 하고 질문을 던졌고, 댓글창은 철학적 논쟁으로 가득했다. 평소 같으면 대충 읽고 넘겼겠지만, 이번엔 이상하게도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문득 유시민 작가의 방송 발언이 떠올랐다.


"우리 몸의 체세포도 몇 달이면 전부 다 바뀌는데,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김문수가 몇십 년이 지난 지금 극우적으로 변한 게 이상하지 않다."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운영하던 진중권과 정부와 방송사의 의도에 맞춰 발언하는 현재의 진중권 사이에도 그러한 변화가 있었다. 유시민 작가의 말은 인간의 변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라 한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나'는 과연 어제의 그 '나'일까? 세포는 끊임없이 교체되고, 기억도 조금씩 변형된다. 젊은 시절 격렬하게 분노했던 일들이 이제는 "그때는 왜 그랬지?"라며 담담히 받아들여진다. 눈물로 범벅이 되었던 이별의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잔잔한 추억으로 남는다.


강물은 쉼 없이 흐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한강'이라 부른다. 마치 우리가 매일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나'라고 불리는 것처럼. 하루하루 미세하게 달라지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본질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속성'일지도 모른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된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 어떤 연속성. 마치 서서히 변해가는 노을처럼, 우리도 그렇게 조금씩 변화해 간다. 20대의 뜨거운 열정이 40대의 깊이 있는 원숙함으로, 단순한 분노가 통찰력 있는 이해로, 순수한 이상주의가 현실적인 지혜로 진화하는 것이다.


테세우스의 배가 여전히 '그 배'로 인정받는 것은, 항해라는 본질적 기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변화 속에서 자신만의 '항로'를 잃지 않는다면,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테세우스의 배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으로 남아 있는 존재.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나는 어떤 나로 기억될 것인가?’ 배의 모든 판자가 바뀌어도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 부르는 건, 그 배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그랬듯이,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때까지 저승에서 살아있을 수 있듯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전설 속에서,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결국 우리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 ‘나’라고 믿지만, 그 ‘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나는 한때 뜨거운 이상을 꿈꾸던 청년이었고, 또 누군가에게 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어른일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 그 변화를 초월하는 어떤 ‘본질’이 남는다. 마치 사라진 파도는 기억되지 않지만,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출렁이는 것처럼.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변화는 필연적이지만, 그 방향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김문수나 진중권처럼 변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변화는 과거의 자신과 단절된 채, 일관성을 잃고 흘러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시민은 변화 속에서도 그의 논리와 설득력을 잃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유연하고 생각의 뿌리는 단단하다.


변화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내 삶의 '항해'를 어디로 이끄느냐다. 방향 없이 떠다니는 배는 결국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다 사라진다. 하지만 확고한 항로를 지닌 배는 변화하는 바닷속에서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모두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변화를 그저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질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신뢰받고,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며,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결국, 테세우스의 배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가?"

"그리고, 그 변화의 끝에서 여전히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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