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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가 May 29. 2024

산책을 하다가

화창한 날과 비 오는 날 같은 길 다른 느낌

제주의 바람은 따스했고, 햇살은 눈부셨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올레길이었다. 완주도, 역올레도, 정해진 코스도 없이 그저 걷기 위한 걷기였다. 숙소에서 가까워 이 길을 택했지만, 언제인가부터 같은 길을 365일 걸으며 그 안에서 변화를 느끼고 싶다는 욕심이 마음 한편에 자리했다. 물론, 그런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실천에 옮길 만큼의 의지나 근면성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내겐 없었다.

화창한 날,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진 평탄한 흙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다니는 곳이 길이 된다'는 옛말이 떠올랐고, 나를 위해 만들어진 길은 아니지만 먼저 걸어간 이들에게 고마움까지 느껴졌다.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이 딱 걷기 좋을 정도의 넓이로 이런 좋은 길을 남겨주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때 그 길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흙탕이 된 길은 신발에 달라붙어 걸음을 방해했고,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피해 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중앙 쪽이 아닌 가생이 쪽 잔디나 풀이 있는 쪽을 밟으며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걷다 문득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길'을 친구에 비유한다면, 나는 좋은 날엔 함께 즐거워하다가도 상황이 나빠지면 쉽게 외면하는 의리 없는 사람이 아닐까? 맑은 날엔 즐겨 걷던 길의 중앙 부분을 비 온다는 이유로 망설임 없이 버리고 길가로 옮기는 모습은 친구를 쉽게 저버리는 행동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런 생각은 나에게 의리와 공감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화창한 날의 길 중앙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친구와 같았다. 하지만 궂은 날씨에 그 중앙길을 외면하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모른 척하는 이기적인 모습과 다름없다. 평소엔 친구를 소중히 여긴다고 외쳐대다가도 정작 친구가 나를 귀찮게 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때면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진정한 친구란 순탄할 때뿐만 아니라 힘들 때도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다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올레길에서 마주한 나의 양면성은 우정이나 의리 같은 것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적어도 의리 있다 말할 수 있으려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친구를 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나는 여전히 궂은날의 중앙길을 피해서 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대며 길을 걸을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의리를 지켜야 하는 상황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를 돌보고, 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길과 친구는 다르다.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나는 그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때로는 피하는 것도 지혜일 수 있다.

제주의 바람은 여전히 따스했고, 햇살은 눈부셨다. 하지만 이제 내가 걷는 올레길은 단순한 길 이상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조금은 평소와 달리 보였다. 나는 나의 길을, 나의 방법으로, 조금 더 현명하게 걸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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