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자동차 불빛을 머금은 나뭇가지들이 차창에 부딪히며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다.
가로등 없는 1차선 비포장 도로를 불빛 하나에 의존한 채 달리는 차는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와 동급이다.
빛 한 점 없는 어둠을 고속으로 달리는 공포에 노출되면 평소 존재감 없던 가로등이 실은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이런 곳에서의 50km 속도는 거의 100km에 버금가는 속도로 체감된다.
거기에 운전자까지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건 B급 호러무비의 완벽한 재연이다.
"지금 어디 가냐?"
"형 집에 데려다주잖아요"
"이 길은 그 길이 아닌데?"
"여기 내가 알아낸 길인데 끝내줘요. 진짜 빨리 갈 수 있어요. 시간이 10분이나 단축된다니까요"
"지금 10분 빨리 가려고 목숨까지 건 거냐?"
1차선 도로 옆은 경사가 꽤 있는 비탈길이다.
"글쎄 기다려봐요. 잘만하면 15분까지도 줄일 수 있어요. 하하"
무섭다.
이 녀석의 운전이 무섭고
이 녀석의 웃는 얼굴이 무섭다.
"그런데 너 안전벨트는 왜 안 하는 거냐?"
"아 몰랐어요? 저 운전할 때 안전벨트 안 해요"
한겨울 반바지를 고집하는 녀석.
믹스커피에 밥을 말아먹는 기행을 일삼는 녀석.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이상한 놈일 줄은 몰랐다.
날 빨리 데려다주겠다는 그 녀석의 목표는 차와 나, 둘을 동시에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여기 1차선 도로야. 맞은편에서 차 오면 어쩌려고 그래. 속도 좀 줄여"
"네 알겠습니다!"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이 녀석은 분명 미쳤다.
"너 트렁크에 삽 같은 거 있는 건 아니지?"
"네? 삽이요?"
"지금 나 묻으러 가는 거 같아서"
"네? 하하 형은 어떻게 이럴 때도 그렇게 재밌어요?"
"이럴 때도..? 묻히러 갈 때도?"
"그만 좀 웃겨요. 나 집중해야 돼요"
맞다.
집중해야 된다.
잘난 술 한잔 먹고 얻어 탄 차에서 죽을 순 없으니깐.
길 끝자락에 다다른 건 길이 시작되고부터 약 20분 후.
정말 30분 거리를 10분가량 단축시켰다.
하지만 공포의 20분으로 기억될 오늘이 난 전혀 기쁘지 않다.
"어? 이 시간에 여기 차가 안 들어오는데"
후배 녀석의 말과 함께 맞은편 차가 하이빔을 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인다.
하이빔 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비켜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형. 잠깐 불 좀 켤게요"
후배 녀석이 뜬금없이 실내등 스위치를 누른다.
생각보다 환한 실내등은 마치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동굴에서 바깥세상으로 막 나온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차 안을 밝게 비추었다.
약 10초 후.
운전 난이도가 꽤 있는 길을 후진으로 비켜주는 맞은편 차를 보며 든 생각.
'후배 녀석이 자신의 얼굴을 이용하고 있다.'
"너 지금 얼굴로 겁주려고 실내등 켠 거야? 그래서 이렇게 밝은 등으로 바꾼 거야?"
"매번 검문할 때마다 내려서 조사당하는 게 짜증 났었는데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하하"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덩치.
약간 벗어진 머리와 진한 눈썹.
과도하게 넙적한 얼굴에 과도하게 작은 눈.
어떻게 보면 순수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조폭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북한군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녀석은 분명 천의 얼굴이란 수식어가 붙어도 아깝지 않을 모습이다.
오늘은 실내등 덕에 생긴 약간의 그늘과 거기에 약간의 인상을 더해 영락없이 사흘 굶은 탈옥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너 이렇게 사람들 놀래키다 나중에 큰코다친다"
"전 그냥 불 켠 것밖에 없는데요? 그리고 다칠 코 도 없어요"
많은 추억들이 있지만, 대학과 얽힌 추억들이 특히 머릿속에 많이 살아 있습니다.
참 특이한 성격을 가진 '기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몇몇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 지어지곤 합니다.
글이란 참 좋군요.
잊고 지냈던 기억들을 동영상 다시보기처럼 다시금 꺼내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편으로 오래전 기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꺼내어준 나의 뇌에 처음으로 감탄한 하루였습니다.
참, 북한군 우리 후배는 현재 딸만 둘을 낳아 딸바보로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