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꽂이.
스탠드.
모니터.
전화기.
사무실 책상 위의 모든 것들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쓰임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이 고정되어 있는 풍경은 나의 안정감의 근원이자 평온함이다. 이 풍경이 지루함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것은, 이제 나에겐 당연한 것을 뛰어넘어 사명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나의 고정된 풍경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맞은편 김미정이 예사롭지 않은 표정을 장착하고 있다.
오늘은 또 왜 그런 것일까.
자꾸 신경이 쓰여 내 사명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난 왜 "신경 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까.
"미정 씨 점심 약속 없으면 나랑 만두 한 접시 하러 갑시다"
김미정은 누구보다 만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만두 마니아다. 밥보다 만두를 좋아하는 동갑내기 김미정과, 달콤한 것 다음으로 만두를 좋아하는 난 가끔 만두 식사를 함께하는 "만두 메이트" 다.
"오늘은 찜튀 말고 국으로 할래요. 뜨거운 거 먹고 좀 잊어야겠어요"
뜨거운 거 먹으면 더 열 받을 텐데...라고 말하려다 때가 아닌 듯하여 급히 다시 삼킨다. 열 받을 땐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상책이다.
"거기 만두집이죠? 네 맞아요. 항상 가져다주시는 곳으로 만둣국 두 개만 보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평소 만두를 시킬 때의 밝은 톤과는 대조적인 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아 김미정에게 건넸다.
"별거 아니에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물이 든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김미정이 말한다.
"평소 밝은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만두로 쌓인 정도 있는데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봐요"
그래. 그만하자. 들어봤자 나만 피곤할 게 뻔하다.
이 정도면 내 할 도리는 다했으니 이걸로 됐다.
"아니에요 됐어요"
그래 이걸로 끝내자.
"근데... "
망했다.
"제가 정말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귀할멈같이 생겼어요?"
"에?? 뭐라고요?"
"다 들었잖아요. 마귀할멈이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귀할멈."
아.
나에게 김미정의 모습은 항상 한 조각이 비어있는 퍼즐 같았다. 분명 누군가를 닮긴 했는데 그게 누구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
머릿속에서 퍼즐이 완성되며 'success' 란 단어가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순간, 김미정의 옷이 마녀의 옷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웃으면 만두로 쌓인 정은 끝이다.
아니 원수가 될 수도 있어.
"갑자기 헨젤과 그레텔은 무슨 말이에요?"
'절대 웃지 않는다'를 수십 번 되뇌며 마음을 다잡는다.
참, 마귀할멈이란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입에 올리는 순간, 나의 표정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 뻔하다.
"어제 언니랑 6살 조카가 집에 놀러 왔었어요. 워낙 책 읽어주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어제도 책장에 꽂혀있는 것 중 손에 잡히는 걸 꺼내서 읽어줬죠. 그런데 이 녀석이 갑자기 '여기 창문에 얼굴 내밀고 있는 할머니가 이모같이 생겼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니하고 엄마한테 책을 들고 가서 물어봤죠"
"뭐라셨어요?"
"다 큰 어른이 애가 하는 말에 뭘 그리 예민하게 구냐고, 철없다 했어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그게 끝이 아니에요. 말이 끝나고 언니가 내가 들고 있던 책을 가져가서 엄마와 보더니 둘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방 안에서 어찌나 크게 웃던지 기분 나빠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선생님도 나랑 이 마귀할멈이랑 비슷해 보여요? 한번 봐봐요"
김미정이 휴대폰을 몇 번 클릭하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책이 어땠길래.. 크.. 크하하하"
휴대폰 속 마귀할멈 그림은 누가 봐도 그냥 김미정이었다.
"미안해요 미정 씨. 나도 모르게 그만..."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린다.
"아니 뭐가 그리 재밌어? 둘이 연애해?"
때마침 휴게실로 실장 선생님이 들어온다.
그러곤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천천히 몸을 굽힌다.
"뭘 보고 그러는.... 크하하하"
미정 씨는 참 성격 좋은 동갑내기 동료였습니다.
동료라기 보단 친구에 가까웠죠.
그날 토라진 거 풀어주느라 소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모릅니다.
물론 술값은 실장 선생님이 다 냈지만요.
다음날 우린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얼큰 만둣국을 먹었습니다.
참, 그 해 크리스마스날.
실장님과 저는 미정 씨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했습니다.
실장님은 '마녀용 항아리'를, 전 '뾰족 모자와 작은 빗자루'를 요.
선물을 주고받으며 셋이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생긴 건 절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좀 웃긴 것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