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열기를 담은 햇살이 수면 곳곳에 떨어지며 영롱한 빛의 기둥을 만드는 수영장의 오후. 굳어진 어깨와 팔, 다리를 풀어가며 수영장에 들어선다. 오늘도 친절하게 초급, 중급, 상급이라 표식 된 안내판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동안 어느 풀이 '진짜' 내 실력에 맞는 레인인가를 일 별하기 위해 빠르게 눈을 굴린다. 오늘의 스캔 결과 내가 헤엄칠 레인은 '중급'이다. 자유수영을 이용하는 나는 늘 이 과정을 거치는데, 그 이유는 버젓이 서 있는 안내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력을 과하게 매기는 일부 이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유심히 지켜보면 대체로 두 갈래의 성향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일고의 여지없이 자신의 실력을 상급이라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당연한 듯이 입장과 동시에 상급 레인으로 직행한다. 이때 '짝' 소리 나는 배치기 스타트는 덤이다. 여기서 이 사람이 상급에 걸맞은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객관적인 자기 평가의 잣대를 발로 차 부수고 아-주 여유롭게, 조급증을 절-대로 내지 않고, 오-래 레인을 오가며 장거리 수영을 한다. 빠른 속도와 힘찬 기량의 퍼포먼스로 수영하기를 원하는 상급 수영자들은 이런 수영인이 한 명 레인에 들어서는 순간, 전체적인 수영의 속도와 감을 확연하게 떨어뜨려야 한다. 이 상황에서 아직 우리 사회가 살만하다고 느끼는 점 중 하나가 보이는데, 어느 누구도 이 느긋한 영자에게 레인을 옮기라는 둥의 볼멘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성향을 알아보자. 두 번째는 앞서 말한 상황과 비슷한 때에 발생한다. 사용하는 레인에 정체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쓴소리는 못하지만 본인의 기량대로 헤엄치고 싶은 사람들이 본인의 수준보다 한 단계 높은 레인으로 대거 유입된다. 이를테면, 초급 영자가 중급으로, 중급 영자가 상급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어느 날은 유독 이런 현상이 심각해 텅 비어 버린 초급 레인을 망연히 바라본 날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있어빌리티라는 말이 있다. 있어 + abillity의 합성어로, 타인에게 그럴듯하고 있어 보이는 능력을 뜻하는 신조어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이 능력은 제법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있어 보이는 능력이 우리 사회에서 왜 중요한 것이 되었을까. 나는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사회의 '어느 정도'에 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취업과 결혼의 시기는 '어느 정도'이고, 몇인 가족은 '어느 정도' 규모의 집에 살아야 하며, 중년이 되면 '어느 정도'되는 차를 몰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어느 정도'는 도대체 어디서 온 기준인가. 이 정도의 한계 속에 계속해서 개인의 인생과 사회에 자충수를 두는 함정에 빠지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기준이 되지 않는 삶,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삼은 삶 속에 온전한 삶의 기준과 즐거움을 잃은 채, 타인의 질시와 부러움, 추앙을 밑천으로 사는 삶이란 얼마나 옹색한 삶인가. 이런 관점에서 일고의 여지없이 자신의 실력을 웃도는 레인을 선택한 사람은 아마 자신의 지인들에게 본인을 '수영을 즐기는 사람'보다 '하루에 몇 킬로 미터씩 상급 레인에서 장거리 수영을 하는 사람'이라 으스대며 소개할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하는 이 불편한 레인 속에서도 내색 않고 함께 흘러가는 사람들의 자비로움에 다시 한번 마음이 녹아내린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로 무마해 버리기에 각각의 삶은 너무나 독특하고 귀한 것이므로, 이를 포용하며 느긋하게 흘러가는 이들의 하루가 복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도 초급 레인이 텅 비었다. 상급 레인의 버벅거림을 감당할 수 없었던 실력자가 초급 레인으로 들어선다. 번뜩이는 수경만으로 실력을 짐작게 하는 화려한 영자가 오늘의 초급 레인을 가로지른다. 너무나 멋진 수영을 초급 레인에서 선보이는 저 영자를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여전히 이 상황이 너무도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