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수영 강습을 받지 않는다. 때때로 유난히 다음 레벨의 계단이 높게 느껴질 때는 강습의 유혹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럴 땐 그냥 거울 속 나의 몸에게 "내 마음은 이런데, 니는 그런갑다." 라고 말한다. 애시당초 내 몸은 마음을 따라 온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답답한 구간에 이를 때면 '니는 그럽갑다'의 힘으로 상황을 무마한다. 또 그렇게 헤엄치다 보면 안 되던 것이 차츰 된다는 것을, 지난 1년간의 시간이 내게 알려주었다.
약간의 안면이 생긴 사람들은 모두 내게 묻는다. "강습 받으면 좋은데, 왜 강습 안 받아요?" 강습이 수영 실력 향상에 좋다는 걸 나라고 왜 모를까. 긴 이야기를 이어가면 밝히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게 될 것같아 "그러게요. 시간이 마뜩찮네요."하고 넘긴다. 수년 전 나도 수영 강습을 받던 때가 있었다. 그 시간들은 물 속을 나아가는 기쁨 보다 원하지 않는 '우리' 속에서 자의에서 비롯되지 않는 역할을 강요 받았던 기억억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유난히 '우리'를 좋아한다. 실오라기같은 줄도 연으로 이어 맥으로 발전시키는 신기한 사람들이다. 물론 덕분에 급속도의 발전이 있을 수 있었다는 그들의 말에 일부 공감한다. 그러나 나처럼 '있어도 표 안 나고, 없으면 표 나는' 정도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과 수영장의 우리는 너무도 부담스럽다. 어느 날 원가 절감을 위해 디자이너를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디자인의 단체 수모를 쓰고 무더기로 자유수영 시간의 레인을 통째로 가로지르는 무리를 가는 눈으로 바라 보았다. 같은 레인을 사용하는 소수의 개인들을 쪽수로 밀어붙이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수의 믿음과 일부의 침묵이 짓이겨온 소수의 권리들을 떠올렸다. 이제서야 이야기할 수 있어진 무수한 역사 속에서의 그것은 엄연한 폭력이었다. 그 거대하고 단단한 폭력성은 시대의 흐름에따라 차츰 갈라지고 쪼개져 왔지만 여전히 아주 작은 파편이 되어 우리 생활 속에 잔재한다. 이 파편이 날붙이처럼 신경을 긁어댈 때면 무리를 짓는 일로 내 안위를 도모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의견들을 아주 살짝이라도 내비칠 때마다 거침 없이 "너 빨갱이냐"라는 말이 밀려드는 세상에서 "저는 빨갱이가 아니라, 개인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하더라도 권리를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 혼자라도 안온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투지를 가진 얼굴로 사회주의자냐고 묻거나,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제멋대로 환치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우리가 되지 않은 채 살기 위해서는 한 톨의 양보 없는 그들의 타자화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직감을 통한 분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잘 모르는 이의 손을 맞잡고 '우리' 속으로 들어가야하는 이 사회가 기이하다 여긴다.
나와 비슷한 시간에 수영장을 이용하는 벽안의 남자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표정으로 알은채 하지만 아무런 참견도, 역할도, 구분하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문득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저와 같은 수준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존재로서 작은 인사를 나누는 일상를 영위하고, 비교적 큰 무리에 속할지라도, 나의 권리는 최소한의 존재로서의 '나'일 뿐, 무리 속 '수 많은 나'의 합계가 내 권리인 양 착각하며 살지 않기를. 납득하기 어려운 우리를 강요받는 대신 작은 점에 불과한 우리가 되어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일별의 즐거움이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