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흐르기 시작하고
그날은 이유 없이 마음이 뒤숭숭했다. 뭘 따지자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왜 맨날 내가 먼저 연락해야 돼? 왜 엄마는 꼭 걱정하는 척하다가 결국 상처 주는 말을 던질까?” 이런 말. 근데 막상 엄마 집 앞에 서니까 입이 안 떨어졌다. ‘여기 왜 왔지?’ 싶은 마음과 ‘그래도 가야지’ 싶은 마음이 둘 다 목줄을 잡고 흔들어대는 느낌.
문을 열자, 엄마는 부엌에 있었다. 된장을 풀고,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고.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너무 익숙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말 안 해도 밥은 차리는 사람. 화가 나도 말은 안 섞어도 밥상만큼은 꼭 내놓는 사람. 나는 소파에 턱 앉았다. “왔어?” 한마디. 끝. 아무 대화도 없다. 나도 빙빙 돌려 말하고 싶었다. ‘엄마, 나 요즘 진짜 힘들어.’ 근데 엄마는 내 감정은 늘 ‘그래, 알았어’ 하고 흘려보내고, 자기 얘기만 진지하게 꺼낸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부엌에서만 움직였다. 그 손길이 이상하게 다 말했다.
뚜껑을 열고 간을 보던 엄마의 표정에서 문득 깨달았다. 엄마는 할 말이 없을 때— 밥을 한다는 걸. 나도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몸을 눕혔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꿈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현실보다 더 선명했다.
1960년대 부엌. 시멘트 바닥에 양은솥. 석유 곤로 위에 주전자 지글지글. 그 부엌에, 찬밥에 물 말아먹는 소녀가 있었다. 열다섯 살, 엄마였다. 작고 마른 몸. 근데 손놀림은 프로였다. 솥을 들고, 된장 풀고, 국 데우고. 이건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살아남은 손이 가진 본능 같았다.
뒤에서 아기가 울었다. 소녀는 아기를 척 업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상을 차렸다. “우리 은혜도 많이 컸겠지….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밥은 먹었으려나.” 은혜. 그게 나였다. 나는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는데, 엄마는 꿈속에서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방 너머에서 누군가 툭 던졌다. “점심 준비 끝나면 안방 먼지 닦고, 기저귀도 갈아놔.” 명령도 부탁도 아닌, 그냥 굴러다니는 말투. 그 한마디에 소녀의 하루가 다 들어 있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내 동생들 밥은 먹었으려나. 나 하나라도 입을 덜어 다행이지, 뭐.”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울음도, 억울함도 없다. 그냥 살아내는 사람의 말투였다.
그리고—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도 멜로디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생존의 노래. 나는 생각했다. ‘야, 소녀야. 내가 너였으면 도망쳤을 거야.’ 근데 너는 그 부엌에서 묵묵히 밥을 짓고 있었다.
“밥 다 됐다, 밥 먹어라.”
엄마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여전히 소파 위. 엄마는 싱크대 앞. 꿈은 끝났지만, 콧노래는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았다. 말없이 수저를 들고 밥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 냄새엔 꿈속 콧노래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엄마를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건 고집도, 희생도 아니었다. 엄마가 그렇게 살아낸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식 앞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엄마… 미안해.” 지금까지 나는 엄마를 ‘나를 힘들게 한 사람’으로만 봤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엄마는 그저, 살아남아야 했던 여자였다. 그걸 인정하니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놓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인생을 존중해야 내 인생도 존중받을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