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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회전문에서

감정을 삼킨 딸들

by 은혜


딸은 요즘 말을 안 한다.
눈만 깜빡깜빡. 그 표정을 보면, 나도 같이 가라앉는다. 뭘 해줘야 하지? 뭘 물어봐야 하지? 괜히 반찬통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날들이었다.


그런 날,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다음 주에 시간 되냐.”
“왜요.”
“시간 되면, 나랑 병원에 좀 같이 가자.”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나 요즘 바빠요. 오빠랑 가요.”
그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가 말했다.
“너희 오빠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나랑 병원 갈 시간이 어디 있냐.”

그 말에, 내 안에 오랫동안 눌러뒀던 무언가가 툭 터졌다.

“엄마는 맨날 오빠만 챙기잖아. 아쉬운 일 있을 때만 나한테 연락하고. 어릴 때부터 항상 오빠 편이었어.”

엄마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너… 김 서방이랑 무슨 일 있냐? 안 그러던 네가 왜 이러냐.”

기가 막혔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요? 나도 바쁘다고요. 항상 시간 많은 사람 아니에요.”

“…그래.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뚝.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손엔 아직 젓가락이 들려 있었다.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반찬을 젓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까는 미안했어. 요즘 내가 좀… 갱년기인가 봐. 내가 같이 갈게.

“그럴래? 알았다.”
엄마 목소리가 살짝 가벼워졌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멍하니 봤다. 그리고 아주 길고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이게 처음은 아니다. 익숙하게 반복되는 무한 루트다. 억울함 → 분노 → 죄책감 → 동정심 → 그리고 또다시, 엄마를 챙기는 딸. 그게 진심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런데도 어딘가, ‘내가 또 내 감정을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감정의 회전문에서 나는 도대체, 언제쯤 빠져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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