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삼킨 딸들
식탁 위로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국은 아직 뜨거웠지만, 우리 모녀 사이의 공기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의 시점
딸은 요즘 말을 안 한다.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만 만지작거린다. 나는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국을 한 번 더 데워본다. “입맛 없니?” 괜히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이 없다. 눈만 깜빡깜빡, 그 표정은 내 마음까지 꺼뜨린다. ‘뭘 해줘야 하지? 뭘 묻지 말아야 하지?’ 내 속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괜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계속 설거짓거리만 만지작거린다. 부엌에는 저녁 냄새가 진하게 내려앉았다. 김치 냄새와 된장국 향이 섞여 마치 이 집안의 모든 긴장이 수증기처럼 퍼져 있는 것 같았다. 수저를 정리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냥 밥상이라도 잘 차리면 괜찮아질까?’
딸 시점
엄마가 반찬통을 계속 열었다 닫는다. 뚜껑이 톡, 탁 부딪히는 소리가 괜히 귀에 거슬린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엄마가 속상해할 걸 알면서도 뭐라 말할 힘이 없다. 엄마의 한숨이 들릴 때마다 ‘내가 또 잘못하고 있나?’ 괜히 미안해진다. ‘밥 좀 더 먹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자야 하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엄마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 목덜미가 따갑다. 그냥 숨을 참고 젓가락만 돌린다.
나의 시점(과거 회상)
문득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엄마 눈치를 보며 밥을 삼키던 스무 살의 나. “너는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니?” 엄마는 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그 말은 내 마음에 칼처럼 박혔다. 엄마가 힘들어 보이면 나는 더 씩씩한 척했다.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돼. 그렇게 내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해졌다.
딸 시점
엄마가 한숨을 쉬면 나는 숨을 죽인다. 엄마 기분이 좋아야 내 하루도 편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 얼굴을 먼저 살폈다. ‘지금 기분은 어떤가? 내가 뭘 잘못했나?’ 그게 습관처럼 굳어버렸다.
나의 시점(자각)
지금 내 딸이 그때의 나 같다. 내가 한숨을 쉬면 같이 움츠러들고, 내 표정을 살피며 말을 아낀다. “거기 학원이라도 다녀볼래?” 내가 권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상담 한번 받아볼래?” 하면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마치 내 감정을 달래주기 위해서.
나는 식탁에 앉아 멍하니 국물을 휘젓는다. ‘이건 아니다.’이 집의 공기가 이렇게 무겁게 식은 이유를 이제는 마주해야 한다. 내가 풀어야 할 것은 딸의 우울이 아니라, 엄마에게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감정의 매듭이다. 이제 그 매듭을 풀어야, 우리 둘 다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