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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선을 그었다

감정을 삼킨 딸들

by 은혜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엄마와 감정의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선은 내 해방일지의 첫 장이 되었다. 그 한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착한 딸의 가면을 쓰고 내 감정을 삼킨 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부엌에 서서 설거지를 하다 말고, 전화기를 들었다. 손에 묻은 거품이 식탁 위로 툭 떨어졌다. 물을 한 모금 마시려다, 왠지 그 순간엔 ‘엄마’가 먼저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이혼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엄마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번호를 눌렀다. 발신음이 세 번 울리는 동안, 내 심장도 덩달아 두근거렸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김 서방하고 무슨 일 있냐?”
엄마의 물음에 숨이 턱 막혔다.
늘 그랬듯 “아니야, 별일 없어”라고 웃어넘기고 싶었다. 엄마를 안심시키는 게 내 역할 같았으니까.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는 착한 딸’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숨을 삼키고, 마치 결심이라도 하듯 말했다.
“어, 엄마… 싸웠어. 너무 힘들어. 나… 이혼하고 싶어.”

순간,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길게 흘렀다.
나는 엄마의 대답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식 생각해서 참아라. 여자는 다 그런 법이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뜻밖에도 말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니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순간, 가슴속 깊이 묶여 있던 매듭이 툭— 하고 풀렸다. 숨이 막혔다가 터져버린 눈물 속에서
나는 알았다. 이혼을 할지 말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은 그 순간부터 내 삶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엄마는 내 감정을 이렇게 받아준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강한 척, 괜찮은 척했다. 엄마가 힘들어 보이면 내 슬픔도, 억울함도 삼켰다. 그게 효도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내 마음을 솔직히 꺼냈다. 그리고 엄마는 그 마음을 어떤 평가도 없이 그대로 받아줬다. 그 한마디는 허락이라기보다 ‘너도 네 인생을 살아도 된다’는 묵묵한 응원 같았다.

나는 깨달았다. 진짜 해방은 이혼을 선택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 감정을 존중하고, 그 감정에 내가 먼저 귀 기울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내가 나를 존중할 때 비로소 가족의 회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엄마와 나 사이에 처음으로 건강한 경계가 생겼다.

왜 나는 그렇게 묶여 있었는지, 왜 해방이 필요했는지— 지금부터 그 여정이 시작된다. 그 여정의 첫 장면은, 내 딸의 우울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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