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일명 ‘웃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당시 과장님이셨던 (지금은 부장님이 되신) 분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도 웃는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본래 웃는 인상이라 앞으로도 바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안 변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아주 오래된 일이 문득 떠오른 이유는, 스스로 ‘나는 과연 변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외적인 변화는 차치하고 ‘웃상’이었던 20대의 나와 40대 중반인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20대의 나나 지금의 나나 ‘웃상’이라는 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웃는 얼굴이고, 여전히 본능적으로 웃으며 이야기한다. 다만, 접대성 웃음과 미소의 빈도가 20대 때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20대의 나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청년이었기에 접대성 미소는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그런 웃음이 가장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항상 ‘웃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독하다는 의미로 ‘싸움닭’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정이 많아 다 퍼주니 영업은 안 될 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인간관계가 무섭게 느껴지고, 전화벨 소리에 노이로제가 생겼던 시절도 있다. 이처럼 많은 일을 겪으며 깨달은 점이 있다. 바로 강하게 살 때는 주변에 적이 많아지고, 반대로 너무 부드럽게 살 때는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사회초년생 ‘웃상’이었던 나는 꽤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다. ‘웃상’의 가장 큰 장점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쉽게 호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호감을 얻기 쉽다는 것은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일을 조금만 잘해도 더 크게 포장되는 효과도 분명히 있다. 이점은 꽤 많다. 하지만 반대로 ‘웃상’은 자신을 얕보이게 만드는 단점도 명확히 가지고 있다. ‘웃상’의 특징 중 하나는 거절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잘 모르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이런 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분명히 생긴다. 자신의 일을 자연스럽게 떠넘기거나, 윗선이나 외부에 잘 보이기 위해 자신도 못 하고 하지도 않을 무리한 업무를 받아와 지시만 내리는 식이다. 일을 도와주기는커녕 이야기 좀 하자며 업무를 방해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의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도 있다.
최악의 기억 중 하나는, 동료가 병원에 입원한다며 내가 전혀 해보지 않았던 업무 지원을 요청했던 일이다. 나는 그저 몸이 많이 아픈 줄로만 알고 아무 말 없이 도와주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미용 성형수술 때문에 자신의 부서도 아닌 다른 부서 사람에게 일을 떠넘겼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다른 일도 많았다. 거래처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 잘못이 분명했지만 상관은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라며 나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럴 수 있다지만, 나중에 그 상관은 거래처와 통화하며 우리 잘못이라고 사과하고는, 그 책임을 내게 떠넘겼다. 가장 기가 막혔던 것은 입사 몇 달 안 되었을 때, 꽤 큰 문제가 터지자 당시 이사님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어차피 자네는 신입사원이라 다들 이해할 테니, 그냥 자네가 잘못한 걸로 하자.” 이 말은 지금 떠올려도 실소가 나온다. 이런 회사에서 20년을 다닌 내가 용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밖에도 외부 회사에서 내부 정보를 얻기 위해 전화로 이것저것 캐묻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깜빡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넘기는 이들도 무수히 많았다. 이처럼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이용하려는 이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부드러움이 약함은 아니지만, 상대방은 부드러운 사람을 약하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이렇게 부드럽게 대하다 이용만 당하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강하게 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웃상’이라는 장점과 업무를 거절하지 않는 성실함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아 진급도 빠른 편에 속했다. 진급이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도 빨리 무거워진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책임감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강함은 잘못된 강함이었다. 무조건적인 방어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다른 이들의 지적에 더 강하게 반발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니 주변에서는 나를 ‘싸움닭’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솔직히 회사 생활만 놓고 보면, 강하게 나가는 것이 편할 때도 있다. 웬만해서는 나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강해야지, 능력도 없으면서 강하기만 하다면 그건 더 큰 문제다. 다행히 나는 전자에 속했다. 차장 시절에는 대표님을 직접 찾아가 업무적인 요구사항을 관철할 정도였다. 사실 굉장히 건방진 행동이 맞다. 하지만 당시 회사 구조와 업무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대표님으로부터 확답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회사 대표님이 이런 내 성향을 좋게 봐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잘렸어도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강하다는 것이 막무가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상대방이 보기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하기가 무척 어렵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업무 협조’라고 말하겠지만, 다른 부서 입장에서는 ‘부서 이기주의’로 비칠 수 있다. 내부적으로도 이런데, 외부적으로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갑과 을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자신은 갑질을 안 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을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만약 을이 악감정을 품은 상태에서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상상해 보라. 과연 순순히 도와줄까? 자신이 당했던 것 이상으로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20년의 사회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너무 강해서도, 너무 부드러워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본 분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비단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강하면서 부드러워야 하고, 부드러우면서 강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실 경험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생각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반드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이룰 수 있는 미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강하게 나갈 때와 부드럽게 나갈 때를 자연스럽게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강하게 나가야 할 때조차 ‘싸우자’는 식의 대립이나 ‘갑질’이 아닌,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련함을 갖게 된다. 이 노련함은 경험 없이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노련함을 가진 척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드러움을 선호한다면 부드럽게, 강함을 선호한다면 강하게 살아도 괜찮다. 나처럼 부드럽게 살다가 강하게도 살아보는 과정을 거쳐도 좋다.
중요한 것은 ‘노련함’을 갖추려는 노력이다. 노련함이란 그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 또 적용해보는 과정을 반복하며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노련함이다. 그저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무조건 노련함이 생긴다면, 이 세상의 모든 중년과 노년은 노련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노련함 없이 마냥 부드럽기만 한 사람, 마냥 강하기만 한 사람,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더 많다. 그리고 그 노련함은 단순히 업무적인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진정한 노련함이란 삶 자체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생활은 그 지혜를 얻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청년이라면, 그저 지금에 충실하게 살아가라. 다만, 앞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잘못된 점이 있다면 보완해서 나아가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삶에 실패란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패란 그저 보완해야 할 지점일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 자연스레 노련함이 생길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가 아니라, 청년 시절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는다면 말이다.
당신이 이미 중년의 길을 걷고 있다면, 과거를 되짚어 보라. 과거의 잘못된 기억 속에서 다른 사람의 탓을 모두 지우고, 오롯이 자신의 잘못과 마주해 보라. 그리고 그때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생각해 보라. 여기서 그치면 지금과 달라질 것이 없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자녀가 다 성장했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했던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으니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 그렇지 않는 것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자녀들이 싫어할까? 조금 어색하고 낯간지럽게 느낄지는 몰라도, 부모의 진심 어린 “사랑한다”는 말을 싫어할 자녀는 없다. 이렇게 과거의 잘못을 하나씩 바로잡아 나가면 된다. 그러면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당신도 삶의 노련함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삶의 노련함이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과정일 것이다. 당신의 삶이 어떤 길을 걸어왔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갈 최적의 시간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이루어, 당신만의 빛나는 노련함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나누어주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바로 지금, 당신의 삶을 더욱 단단하고 풍요롭게 가꿀 노력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