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初夏)의 이른 새벽 라운드 하러 달리노라면, 설레임으로 뒤척였던 전날 밤의 선잠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맑은 공기, 푸른 초목을 타고 아침 안개가 산자락에 고개를 내민다. 산새들은 일출에 늦지 않으려 날개짓을 서두른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다. 다채로운 의상으로 치장하고 카트 옆에서 서성일 때, 수줍은 햇살이 산고개를 넘어 안개와 춤을 춘다. 어쩌면 여름 라운드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리라.
[남춘천CC, 2020 . 8.(필자 촬영)]
초여름의 자연을 낭송한 중국의 시인과 우리 선조의 시구를 가까이 할 수 있다면 자연과 골프, 그리고 골퍼간의 일체감은 한층 더 해진다. 이른 아침의 아름다움, 초하 라운드의 즐거움, 그리고 멋진 주인공의 행복감이 하나로 동화되어 신선세계에 올라온 듯하리라.
중국 당송(唐宋)의 유명시인인 양만리, 맹호연, 고병, 신기질과 고려시대 문신인 김부식의 시(詩)와 사(詞)가 그 분위기를 더해준다.
<새벽에 임자방을 보내며> 양만리(송)
6월 중순 서호의 풍경은 필경
다른 계절과 이리도 다른 지.
한 없이 펼쳐진 연잎이 푸른 하늘과 이어졌고,
양광에 비친 연꽃은 유난히도 붉구나.
<曉出净慈寺送林子方> 楊萬里(宋)
畢竟西湖六月中, (필경서호유월중) `
風光不與四時同. (풍광불여사시동)
接天蓮葉無窮碧, (접천연엽무궁벽)
映日荷花別樣紅. (영일하화별양홍)
<여름 남정에서 신대를 그리워하며> 맹호연(당)
바람에 실려오는 연꽃 향기는 그윽하고,
대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 소리 맑구나.
<夏日南亭懷辛大> 孟浩然(唐)
荷風送香氣, (하풍송향기)
竹露滴清響. (죽로적청향)
[2021. 8.(필자 촬영)
송나라 4대시인인 양만리(楊萬里)의 시와 당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시구는 여름철 연꽃 향기의 그윽함을 맛깔 나게 표현한다. 중국 서호(西湖)를 무대로 하늘에 닿은 듯이 드넓게 펼쳐진 연잎이며, 양광(陽光)에 유난히 빛나는 연꽃이 눈 앞에 선하다. 연꽃향기가 초하의 이른 아침 바람에 실려온다. 대나무 잎에 살포시 얹혀 있던 수정이슬이 떨어지며 청아한 소리를 드리운다. 그 부근의 코스에서 라운드를 할 때면, 저 멀리서 시나브로 퍼져오는 연꽃 향기와 청아한 이슬 소리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인색한 채 오로지 게임에만 몰입한다면 어찌 대자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으리오?
<산속 정자의 여름> 고병(당)
긴 여름 무성한 나무에 녹음은 짙어 가는데,
누각의 그림자가 연못에 어른거리네.
<山亭夏日> 高駢(唐)
綠樹濃陰夏日长, (녹수농음하일장)
楼台倒影入池塘. (누대도영입지당)
고병(高駢)은 한여름의 더위에도 유유자적을 즐긴다.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페어웨이에서 스윙을 하고 나면 커다란 나무그늘의 시원함이 생각 난다. 주변에 연못이나 시내가 흐를 때 그 위를 스치는 바람결은 카트의 선풍기를 무색케 한다. 녹음(綠陰)이 짙은 그늘집에서 금방 내온 수박을 마주하면 성하(盛夏)의 시원함은 형언할 수 없으리라.
[2015. 9.(필자 촬영)]
<서강월> 신기질(송)
볏꽃 향기가 퍼지면 풍년이 온다고.
한바탕 개구리 소리가 거드는 듯.
<西江月> 辛棄疾(宋)
稻花香裏說豊年, (도화향리설풍년)
聽取蛙聲一篇. (청취와성일편)
볏꽃 향기가 개구리의 노래소리를 타고 퍼지면 풍년소식이 다가온다. 농부가 새참 때 망중한(忙中閑)의 탁주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필자의 학창시절 농번기의 서정과 겹치는 대목이다. 신기질의 사(詞)에 나오는 볏꽃 향기와 개구리 노래소리가 시공(時空)을 넘나들며 들판의 여름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해준다.
<관란사루> 김부식(고려)
6월의 세상은 녹일 듯 무더운데,
온종일 강가 누각에서 맑은 바람을 쏘이네.
<觀瀾寺樓> 金富軾(高麗)
六月人間暑氣融, (유월인간서기융)
江樓終日足清風. (강루종일족청풍)
김부식의 시구는 한 여름 누각에서 즐기는 청풍(淸風)을 음미하게 한다. 김부식이 개성에 있는 관란사(觀瀾寺)에 갔다가 강가의 누각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맑은 바람을 쏘이며 세상을 녹이는 듯한 6월의 무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강루(江樓), 청풍(淸風)의 네 글자로도 한 여름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주는 선물이다. 고산지대의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하다 그늘 아래서 쉬노라면 염천(炎天)은 어느새 청풍에 날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