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하기에 가장 좋은 기간은 입추부터 만추까지다. 창공(蒼空)에는 백운(白雲)이 수를 놓고, 산자락 잎새에는 진초록이 시나브로 옅어진다. 산허리를 지나는 가을 바람은 국화 향기를 머금는다. 골퍼가 이런 대자연을 뒤로 한 채 골방에서 서책에 몰두하기는 어려우리라.
스윙 후 창공의 흰 구름을 가슴으로 맞이할 풍격(風格)이 없는 골퍼여! 그린으로 걸어가며 산자락의 국화에게 엄지척을 할 운치가 없는 골퍼여! 멋진 시그니처 홀에서 아름다운 산하와 나눈 미소를 포토에 담을 여유가 없는 골퍼여! 대자연이 어찌 그대에게 고상한 골퍼라 할 수 있겠는가?
[중부CC, 2018. 11.(필자 촬영)]
가을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땐, 중국의 유명 시인들도 조선시대의 멋진 시인들에게 자리를 비켜줘야 하리라. 조선시대 심희수(沈喜壽), 정대식(丁大寔), 그리고 최석항(崔錫恆)의 시는 가을 골퍼의 설레는 마음을 한층 들뜨게 만든다. 거기에 당나라 두목(杜牧)과 송나라 임포(林逋)의 시도 그 정취를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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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에 선홍빛 단풍 가득할 때, 심희수(조선)
먼 산봉우리 앞을 지나가는 바람소리.
萬山紅葉, (만산홍엽) 沈喜壽(朝鮮)
風前遠岫聲. (풍전원수성)
심희수의 시구(詩句)는 단풍이 짙어가는 가을 소리를 시각적으로 전한다. 심희수는 정철(鄭澈), 이정구(李廷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지인을 송별하는 주연(酒宴)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소리를 운에 맞춰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 한 줄의 글에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져 만추의 서정이 넘쳐난다. 선조들의 고상한 풍류와 유유자적한 자태가 각박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늦가을> 정대식(조선)
들국화와 계곡의 단풍을 보니 서리가 머지 않아 내릴 듯,
무르익는 가을빛이 그림 속에 짙어가네.
<秋晚出惠化門> 丁大寔(朝鮮)
野菊溪楓霜意近, (야국계풍상의근)
十分秋色畫圖中. (십분추색화도중)
정대식(丁大寔)의 시구에는 국화향기와 단풍색깔이 하나 된 시의(詩意)가 돋보인다. 가을 라운드를 하다 보면 하얀색 들국화가 차가운 바람에 하늘거리며 반겨준다. 만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손짓이리라. 산수화에 가을을 담아본다. 그 안에 들국화가 머지 않아 초동의 정취를 가져올 서리와 함께 하얀 조화를 이루어 낸다.
[서산수CC, 2021. 10.(필자 촬영)]
<가을풍경> 최석항(조선)
가을에 나무꾼이 산길을 돌고 도는데,
가는 곳마다 맑은 바람뿐이네.
석양녘 새들이 숲으로 가는 소리에,
단풍이 두세 잎 떨어지누나.
<秋景> 崔錫恆(朝鮮)
秋山樵路轉, (추산초로전)
去去唯清風. (거거유청풍)
夕鳥空林下, (석조공림하)
紅葉落兩三. (홍엽낙양삼)
산자락에 펼쳐진 골프장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한다. 가을 산길을 위아래로, 좌우로 도는 듯하다. 석양이 서산에 걸리기 시작할 즈음엔 산새들도 골퍼처럼 돌아갈 채비로 바빠진다. 산새의 가을 노래소리에 라운드를 마친 골퍼의 마음이 흔들린다.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단풍잎이 만추지정(晩秋之情)을 더 깊게 해준다.
<고산사에서> 임포(송)
가을 경치 넘칠 때 외로운 새 날아가고,
석양이 살며시 져가는데 차가운 연기가 이는구나.
<孤山寺端上人房寫望> 林逋(宋)
秋景有時飛獨鳥, (추경유시비독조)
夕陽無事起寒烟. (석양무사기한연)
최석항의 시에 나오는 그 산새는 송나라 시인인 임포의 시 속으로 날아든다. 조선시대에서 송나라 때로, 한반도에서 중원으로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교감이다. 계절, 경치, 석양, 산새라는 모티브가 가을의 고적(孤寂)함을 통하여 골퍼들의 마음을 한층 무르익게 해준다.
[뉴스프링빌CC, 2012. 10.(필자 촬영)]
<산행> 두목(당)
멀리 있는 가을산의 돌길을 오르는데,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人家)가 있구나.
무르익는 단풍을 즐기려면 수레를 세워야 할 걸.
서리 맞은 단풍잎이 2월의 꽃보다 붉구나.
<山行> 杜牧(唐)
遠上寒山石徑斜, (원상한산석경사)
白雲生處有人家. (백운생처유인가)
停車坐愛楓林晚, (정거좌애풍림만)
霜葉紅于二月花. (상엽홍우이월화)
당나라 때의 유명 시인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은 가을을 타는 중국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된다. “무르익는 단풍을 즐기려면 수레를 세워야 할 걸(停車坐愛楓林晚).”이라는 구절은 가을골퍼의 마음을 흔들며 손짓한다. 잠깐이라도 카트를 세우고 선홍빛 단풍잎과 그윽한 향기의 조화를 느껴보라. 가을바람을 따라 산자락을 오르내리는 골퍼에겐 흔하지 않은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