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골프는 은빛 소풍을 겸해서인지 또 다른 묘미가 있다. 순백 산하의 아름다움과 겨울 공기의 해맑음이 조화를 이룬다. 송백 가지 위의 백설과 대지에 닿으며 내는 청아한 울림이 도처에 넘친다. 그 속에서 원색의 공을 날린다. 맑디 맑은 기운을 마시며 하얀 필드에 사각사각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모습은 겨울 작가에 가까우리라.
페어웨이는 은빛 설원으로, 그린은 초록 마당으로 초동(初冬)과 만춘(晚春)이 동화된 모습이다. 은빛에서 초록으로, 초동에서 만춘이라. 원색의 조화와 시간의 초월이 공존한다. 스코어에 집착하는 코스에서 스토리가 만개한 작품무대로 넘나든다. 라운드 후엔 은빛 스토리로 웃음꽃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다.
[지산CC, 2019. 3.(필자 촬영)]
겨울의 아름다움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시인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청아한 소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조 때 문신인 신흠(申欽)의 시는 은빛 천하를 그려내는 풍격(風格)이 빼어나다. 또한, 당나라 때의 원진(元稹), 장위(張謂)와 송나라 때의 여본중(呂本中), 양만리(楊萬里)의 겨울 시도 순백 자연미를 물씬 풍기게 해 준다.
<대설> 신흠(조선)
산과 골에 눈 덮이니 가없이 하나이고,
옥으로 빚은 세상은 수정 궁전이로세.
세상사에 화가들 무수히 많은데,
음양의 깊은 변화는 그려내기 어려우리.
<大雪> 申欽(朝鮮)
填壑埋山極目同, (전학매산극목동) `
瓊瑤世界水晶宮. (경요세계수정궁)
人間畫史知無數, (인간화사지무수)
難寫陰陽變化功. (난사음양변화공)
만천하가 옥처럼 하얗고 수정처럼 맑은 건 절대자의 조화가 아니고서는 감히 이루어 낼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어떻게 순백의 산하를 해맑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대자연의 청아한 경지는 인간세상의 검은빛 욕심과 혼탁한 갈등에 경종을 울린다.옥빛 겨울라운드를 통해 다가갈 수 있는 가르침이다.
[레이크힐스CC, 2016. 2.(필자 촬영)]
<서쪽으로 돌아가며> 원진(당)
눈이 가득한 산자락에 겨울 꽃이 피어 있고,
푸르른 버들가지마다 얼음 구슬이 열렸네.
<西歸絕句> 元稹(唐)
寒花帶雪滿山腰, (한화대설만산요)
著柳冰珠滿碧條. (착류빙주만벽조)
가을의 여운이 남아 있는 초겨울의 모습인 듯하다. 꽃과 눈, 버들과 얼음간의 미묘한 대조가 초동(初冬)의 정취를 드러내 준다. 또한, 희고 푸른 색채의 대비도 이 시의 심미감을 더해 준다. 골퍼들이 산허리의 잔설과 연푸른 실버들을 보노라면 한 해의 골프스토리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일찍 핀 매화> 장위(당)
물 근처의 매화가 먼저 핀다는 걸 몰랐네.
겨울을 지내온 눈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걸.
<早梅> 張謂(唐)
不知近水花先發. (부지근수화선발)
疑是經冬雪未消. (의시경동설미소)
<답사행> 여본중(송)
눈은 매화인 듯, 매화는 눈인 듯,
같은 듯, 아닌 듯, 모두가 기이한 절경이네.
<踏沙行> 呂本中(宋)
雪似梅花,梅花似雪, (설사매화, 매화사설)
似和不似都奇絕. (사화불사도기절)
장위의 시구(詩句)와 여본중의 사구(詞句)는 매화와 백설간의 깊은 인연을 절절히 그려낸다. 매화는 겨울향기를 잊지 못하고 새싹이 나기 전에 꽃으로 먼저 인사한다. 매화가 백설과 한 자리에서 마주하기는 어려울진대, 계절의 길목에서 아쉬움을 나누다가 초봄으로 이어주는 듯하다. 특히, “눈은 매화인 듯, 매화는 눈인 듯”이라는 구절은 가슴을 울린다. 백설과 매화가 동화된 자태는 고아(高雅)한 풍격(風格)을 넘치게 해준다.늦겨울 골퍼가 백설과 매화 사이에서 그 풍격에 심취해 볼 만하다.
<눈 내린 후 저녁> 양만리(송)
맑게 갠 후 동산의 눈이 가장 좋다오.
연붉은 노을 속에서 은산(銀山)이 솟아오르네.
<雪後晚晴四山> 楊萬里(宋)
最愛東山晴後雪, (최애동산청후설)
軟紅光裏涌銀山. (연홍광리용은산)
양만리(楊萬里)의 시구는 백설의 청아(淸雅)함을 저녁노을과 대비하여 오묘한 신비감을 더해 준다. 맑게 갠 하늘 아래 동산의 백설이 눈 부시다. 여기에 연붉은 저녁노을이 펼쳐지는 무대 위로 은빛 동산이 살며시 솟아오른다. 이처럼 아름다운 겨울코스가 있다면 진정 다른 계절에서 누릴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리라.
◆ 작자
✔ 신흠(申欽) : 1566~1628, 조선 문신
✔ 원진(元稹) : 779~831, 당나라 중기 재상, 시인
✔ 장위(張謂) : ?~777, 당나라 시인
✔ 여본중(呂本中) : 1084~1145,송나라 시인, 사인(詞人)
✔ 양만리(楊萬里): 1127~1206, 남송 4대문인
◆ 한자
● 大雪(대설), 申欽(신흠)
✔ 填: 메울 전, 壑: 골짜기 학, 埋: 묻을 매, 瓊: 옥 경, 瑤: 옥 요, 晶: 수정 정, 寫: 베낄 사, 功: 공로 공
● 西歸絕句(서귀절구), 元稹(원진)
✔ 帶: 지닐 대, 腰: 허리 요, 著: 드러날 저, 冰: 얼음 빙, 珠: 구슬 주, 碧: 청록색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