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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팀 이름이 생기다

64일 다이어리

by 패미로얄

<day 17> 10월 7일

영어 수업을 다녀와야 하는 오전 한 시간, 아빠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원래는 2시간 정도 소요되는 수업인데 지금 이 순간, 영어수업보다 중요한 건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1시간 수업만 참여했다.


집 주변에 여유롭게 풀을 뜻은 사슴을 볼 때마다 아빠는 참 신기해하시며 사진을 찍으신다. 돌아오는 길, 사슴가족을 보자 나도 모르게 차를 세우로 창문 밖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아빠가 한국으로 가시고 나면 사슴만 봐도 아빠 생각이 날 것 같다.

에슨의 사슴가족




아직도 예쁜 노란 단풍이 남아있는 도서관 건물을 찾아 마시막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물론 노란색이 많이 빛이 바랜 모습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단풍이 떨어지는 모습이 꼭 한 사람의 인생 같다는 아빠의 말씀을 떠올리며 오늘하루도 가장 예쁘고 가장 행복해게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단풍속 아빠





아이들 돌아오기 30분 전이다. 상쾌한 가을바람을 느끼기 위해 학교 뒤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역시나 나뭇잎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우리 때문에 깜짝 놀란 다람쥐의 경계심 가득한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상황버섯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체적인 모습이 궁금하네?"라고 말을 떼시기가 무섭게 산책길 자작나무 무리에서 상황버섯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상황버섯이 내 눈에 들어왔을까? 우리는 마치 숲 속에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호들갑을 떨며 상황버섯가까이로 다가갔다. 손으로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기념사진도 남기니 왠지 모르게 뿌듯한 생각까지 든다.

"이거 따면 안 되겠지?"

"아빠! 이거 칼 없으면 못 따요. 또 여기 사람들 많이 다니는 길이라 이거 따다가 걸리면 우리 벌금 내야 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탐스러운 상황버섯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크아.... 제법 크던데.... 칼만 있었어도 어떻게 따오는 건데...'

아빠도 옆에서 아무 말씀이 없으신걸 보니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상황버섯을 생각하고 계신가 보다.




오늘의 프로젝트는 엄마표 육개장을 끓이는 것이다. 며칠 전 통화로 엄마의 손맛을 그래도 낼 수 있는 엄마만의 요리법을 듣기는 했지만 과연 그 맛이 날지 의문이다.

캐나다에서 끓여보는 육개장




레슨을 마치고 나니 8시가 조금 넘었다. 사부작사부작 (사실은 엄청 시끄러웠다.) 육개장을 끓이기 시작했다. 방에서 쉬시던 아빠가 나오셔서 육개장 끓이는 걸 도와주셨다. 엄마가 시키신 대로 각 재료들을 따로따로 데친 다음 양념(간장, 소금, 참기름, 마늘)으로 밑간을 해놓고 데친 물은 한군대로 모아 육수를 만들었다.

보기에는 시뻘겋게 아주 그럴싸하다. 하지만 뭔가 2%가 부족한 맛이다.

"아차!!!! 엄마가 라면 수프를 넣으라고 하셨는데?"

오늘따라 집에 라면이 없다. 일차로 이렇게 초벌로 끓여놓고 내일 라면을 사 와서 마무리해야겠다. 이 부족한 2%의 맛을 라면 수프가 잡아줄 수 있다는데 새삼 놀랍다. 정말 라면수프는 마법의 수프인가 보다.

육개장을 끓이고 있는 이 큰 냄비를 몇 년 만에 창고에서 꺼내보는지 모르겠다. 냄비뿐만이 아니라 잘 쓰지 않는 큰 국자, 큰 도마, 양푼, 채반 등등 많은 주방용품들이 한몫을 했던 저녁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싱크대는 설거지 거리로 한가득이다.

아빠가 계시기에 겂없이 끓여보았던 육개장이지만 앞으로 몇 년(부모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동안 다시는 끓일 일이 없을 것 같다.(힘이 든 만큼 엄마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엄마의 맛에서 조금 많이 모자랐다.)




장인어른은 열심히 부엌일을 하시는데 우리 배짱이 사위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점점 서로 편해지고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겠지? 아빠는 이런 신랑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다면서 동영상으로 담으셨다.

"나 우리 팀 이름 지었어! <장인어른과 배짱이> 어때?" 아빠의 칭찬에 신이 난 신랑이 아예 공사팀 이름까지 지었다.

오로라 와치에서 알림이 왔다. 어쩌면 오늘밤 오로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에슨에서 아빠가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저녁 오로라가 보일 확률이 54%라고 하는데 빨리 글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그 멋진 날이 오늘밤이기를 기대하며.




11시 30분 오로라를 보았다.

구름이 많아서 육안으로는 보기 힘들었지만 확실히 오로라였다. "아빠! 아빠! 아빠!" 호들갑스럽게 불러대는 소리에 잠들었던 가족들이 모두 뛰어나왔다. 아마도 홍보영상처럼 신비한 빛들이 출렁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하셨는지 아빠는 조금 섭섭해하시는 모습이었다. 이날 저녁 오로라에 흥분하며 뛰어다닌 건 우리 집에서 나 하나뿐이었다. 후다닥 뛰어나온 신랑과 두 아이들도 엄마가 민망해할까 봐 슬그머니 다시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분명 엄청 큰 오로라였을 거야. 구름이 너무 많고 이미 집에서 멀리 흘러가 버려서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 내 잘못도 아닌데 자꾸 구차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다음에는 꼭 멋진 오로라를 보리라! 오로라와치 알림 설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원망스럽게 멀리 사라져 가는 오로라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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