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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인데?

64일 다이어리

by 패미로얄

<Day 47> 11월 6일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빈소에 다녀왔다. 모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이 사진 한 장으로 캐나다 식구들은 마음의 위로가 많이 되었다.

지구 어느 곳에서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 못 이루고, 다른 한편에서는 바쁜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시간과 싸우고 있다.




오늘은 막내가 아빠와 함께 출근을 하는 날이다. 직업탐방이라고 해야 하나? 아빠와 함께 출근하는 이 날은 결석처리가 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체험학습을 하는 날이라고 설명하면 맞을 것 같다. 오늘 아이는 병원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이 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날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질문을 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해답을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두 부녀(남편과 딸 그리고 아빠와 나)가 함께 보내는 수요일이다.




날씨가 영상 10도는 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따뜻한 날, 이렇게 좋은 날을 아깝게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우리는 그동안 미뤄왔던 기둥 페인트 칠을 하기로 했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아빠가 열심히 오래된 페인트를 벗겨내셨다. 페인트 칠이라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하기 싫지만 기둥한개 정도야 정말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둥이 속살을 다 들어내고 주소를 나타내는 메탈숫자도 모두 떼어 냈다. 그리고 위풍당당 페인트를 사러 갔다.


"페인트를 줄 수가 없어. 48시간 동안 10도 이상을 유지하는 환경에서 페인트 칠을 해야 하거든."

"어? 우리 벌써 페인트 칠할 준비가 다 되었는데?"

"미안하지만 그래도 지금 칠하면 안 돼."

"음.... 그래도 굳이 우리가 칠해야겠다면? 우리 기둥에 페인트도 다 벗겨냈단 말이야."

"지금 칠하면 후회할 거야. 내년 봄에 다시와. 기둥이 그동안에 별 탈 없이 견뎌줄 거야."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고 판매를 거부한 직원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아니, 내가! 내 집에, 내가 원하는 때에 페인트 칠을 하겠다는데!'


우리는 결국 페인트 구입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아쉬운 표정으로 메탈 번호를 앙상하게 드러난 기둥에 다시 고정하셨다. 페인트를 사서 쓱쓱 칠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페인트 작업에 온도와 건조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니 아빠와 난 적잖이 놀랐다. 역시 페인트는 쉬운 영역이 아니다.


10도 이상의 온도가 48시간 동안 유지될 리 없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우린 페인트를 칠 할 수 없다. 덕분에 기둥만 시원하게 때를 벗겼다.

기둥 페인트 실패




우리 집에는 마치 장식품처럼 오랫동안 부엌 한쪽을 장식하는 두 개의 단호박이 있었다. 단호박을 사다 두기는 했는데 요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장식품처럼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중 한 개는 아빠가 오시고 다음날 단호박 부침개로 맛있게 먹었고 오늘은 그 나머지 한 개를 요리한 날이었다. 꼭 엄마의 손맛으로 먹이고 싶었는데 나름 흉내라도 내시겠다며 아빠는 열심히 단호박을 채 썰고 오븐 앞에서 부침개를 부치셨다. 사실 너무 오래돼서 엄마의 부침개 맛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맛보는 이 맛이 바로 엄마의 맛, 아빠의 맛일 것이다.


온 집안이 달콤한 호박과 고소한 기름냄새로 가득 찼다. 밤 9시가 넘었건만 부침개 가게는 열일 중이다. 장인어른을 돕겠다고 앞치마까지 두른 남편이 몇 번 부침개를 뒤집더니 벌러덩 부엌 바닥에 누워버렸다. 역시 장인어른과 배짱이다. 아빠와 함께하는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참 소중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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