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Day 63> 11월 23일
캐나다 랜딩 첫날 아빠는 손자에게 팔씨름 도전장을 내셨다. 늦은 시간 짐도 풀기 전에 둘은 온갖 기압을 넣으며 서로 먼저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전거도 혼자 못 타던 3살짜리 꼬마가 이제는 제법 할아버지 팔뚝과 견줄만한 몸매가 되었으니 신기하기도, 기특하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빠는 손자에게 마지막 팔씨름 도전장을 내미셨다. 아빠는 늘 동생들에게 억울한 불만이 있으셨다.
"아! 이 녀석들 나를 너무 노인 취급을 해!"
자기 관리에 있어서는 둘째가 라면 서러울 정도로 철저하신 분이기에 힘없고 연약한 노인대우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셨을 것이다.(사실 공사하면서 느낀 거지만 아빠의 체력은 나와 신랑보다 월등히 뛰어나셨다. 이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코끼리만큼 튼튼해 보이는 통 다리에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손자와 힘겨루기에서 아직 이길만 하다는 만족감은 아빠를 더 젊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잔뜩 주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서로에게 승리를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손을 맞잡고 있는 이 순간은 승리를 떠나서 두 사람이 가장 가까이 통하고 있는 최고의 순간이다.
어젯밤 저녁기도는 아들이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기도는 막내딸이 했다. 하루 세 번 늘 먼저 대표 식사기도를 하셨던 아빠가 어제부터 기도를 못하시는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결혼하기 몇 주 전부터 아빠는 식사기도를 하실 때마다 통곡을 하셨다. 아빠가 울면 엄마가 울었고 엄마가 울면 우리 딸 셋이 같이 울었다. 누가 보면 봉사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팔려가는 딸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금요일부터 주일 아침까지 알버타에는 폭설 주의보가 내려졌다. 안개만 껴도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에어캐나다가 과연 이 폭설을 이겨내고 이륙할 수 있을지 우리 모두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에드먼튼에서 밴쿠버를 경유해서 인천공항까지 가셔야 하는데 밴쿠버 경유 대기시간이 겨우 1시간이 남짓이다. 만약 에드먼튼에서 비행기 이륙이 지연될 경우 당연하게 인천행 비행기를 놓치게 되어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편 비행기 티켓팅과 호텔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는지 오만가지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오전 10시 30분.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에드먼튼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 에어캐나다 앱을 통해 온라인 체크인을 했다. 엡을 통해 수화물 가방 한 개를 더 추가해 결제까지 하고 나니 이제 마음이 초조해진다. 23킬로가 아주 조금 못 되는 수화물 가방두 개와 기내가방 1개, 그리고 초콜릿을 가득 담은 책가방 1개를 가지고 탑승을 하게 되시는 거다. 신랑은 60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가져가셔야 하는 아빠의 손목을 걱정하고 있다. 공사기간 동안 실리콘 작업으로 무리가 갔던 아빠의 손목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셨기 때문이다. 아빠의 걱정은 신랑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난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해프닝을 걱정하고 있다.
"이렇게 며칠을 고민하며 짐을 쌌는데 공항에서 무게초과로 가방을 다시 열어야 하면 어떡하지?"
"기내가방에 잔뜩 들어있는 과자와 초콜릿들이 통과가 되지 않으면 어쩌지?"
장인어른과 배짱이팀은 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킨다.
"아이고, 별 걱정을! 걸리면 주고 오면 되지!"
아빠가 제일 좋아하시는 음료수는 팀홀튼의 아이스 카푸치노다. 보약 챙겨드시듯 사위 또는 손자와 몰래 가서 하루에 한잔씩 챙겨드시는 게 기쁨이셨다. 아이스 카푸치노는 우리 집에서 자주 허락되는 간식이 아니다. 높은 카페인과 몸에 좋지 않은 크림 때문에 어쩌다 장거리운전을 할 때나 피곤하고 지칠 때에 먹을 수 있는 음료수였다. 아빠를 핑계로 하루에 한잔은 눈치 안 보고 마실 수 있었으니 신랑과 아이들이 신이 날 수밖에. 에드먼튼 갈 때마다 들렸던 하이웨이 16 팀홀튼은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남자들 만의 약속의 장소였다. 일주일에 한 번 오고 가는 길에 들렀으니 아마 한국에 가셔서도 이 팀홀튼은 아빠에게 즐거운 기억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이곳에서 마지막 아이스카푸치노로 추억을 만들며 오늘따라 진지하게 커피맛을 음미하는 중이다.
겨울잠바를 사러 갔다. 폭설주의보가 내린 이상 얇은 바람막이 잠바 차림으로 보내드릴 수는 없다. 집 근처 들릴 수 있는 모든 매장에 들러 10개가 넘는 옷을 입어 보았다. 덕분에 아빠의 목뒤에 가격표에 긁힌 상처까지 생겨버렸다. 아빠는 가격이 비쌀까 봐 입어보는 제품마다 "따뜻하다!", "이거 좋다!" "그래서 이건 얼만데? 비싸지?"를 반복하시며 선뜻 선택을 하지 못하셨다. 결국 모든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다. 내 마음에 들면 가격이 너무 비싸고, 가격이 좋으면 제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잘 입으실 수 있으면서, 기내에서도 짐이 되지 않는 겨울 파카를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맞다! 어려운 일이다. 내가 욕심이 과했다.) 떠나시는 그 순간까지 숫자에 연연하는 나의 모습이 죄스럽고, 밉고, 짜증이 났다.
집에 돌아오며 기숙사에 있는 큰아이를 픽업해 왔다. 기특하게 에슨의 작은 아이들도 무사히 운전해서 에드먼튼 집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 에드먼턴 우리 집은 최고로 북적대는 하루였다. 큰아이의 남자친구가 아빠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함께 방문했다. 파란 눈의 잭슨은 제법 의젓하게 아빠와 악수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가족식탁에 둘러앉았다. 마지막 저녁 대표기도는 큰딸이 했다. 덕분에 우리의 식탁은 눈물대신 웃음이 가득했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짓꿋게 잭슨에게 손녀딸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교재를 하고 있는지 물었다. 질문을 받은 잭슨보다 우리 세 아이가 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이런 실례가! 정말 못 말리는 아빠다. 신랑이 처음 아빠와 만났던 그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참 변함없이 한결같으시다. 잭슨은 식사를 멈추고 긴장 가득한 얼굴로 헛기침 몇 번을 하더니 아빠를 똑바로 보며 조목조목 이야기룰 시작 했다. 영어와 한국어 동시통역이 이루어졌다. 잭슨의 대답에 아빠보다 진이가 더 감동한 얼굴이다. 오늘 이 녀석 우리 가족들에게 점수를 제대로 딴것 같다.
밤 9시가 넘었건만 아이들은 에드먼튼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드셔봐야 한다며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갔다. '띠링띠링' 아이 들도부터 전달되는 인증사진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행복과 웃음과 설렘이 실려 있었다. 영하 17도가 넘는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라니! 틴에이저들의 젊은 에너지를 받아 아빠는 지금 젊어지시는 중이다.
밤 11시.
피곤하시지도 않으신지 아빠는 오늘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하고 계신다. 아직 시험기간인 아이들은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결국 신랑과 내가 먼저 꿈나라로 가야 할 것 같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