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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May 11. 2023

알버타 산불 대피일지

Day 1 : 5월 5일

재난문자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건 일주일 전일 것이다. 집에서 1시간 반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산불이 났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되면 알버타에는 바짝 말라있는 나뭇잎들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크고 작은 산불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번 것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진압이 되고 있지 않는 걸 보니 큰 산불로 번지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5번 이상 숨넘어가는 듯한 재난문자 알람 소리 때문에 없던 애도 떨어질 지경이다. 긴급 대피장소로 지정된 우리 동네는 호텔도, 식당도, 스포츠 센터도 대피해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서로 섞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음을 열고 서로를 살피고 있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이동하는 소방헬기의 소리가 심상치 않았던 오늘. 그래도 늘 그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일상을 시작했다. 평소처럼 아이들을 기상시키고 도시락을 싼 후 시간에 딱 맞추어 완벽하게 세 아이를 등교시켰다. 뿌듯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마신뒤 조용한 집, 아늑한 내방(신랑이 출근을 했으니 퇴근 전 까지는 방해받지 않는 내방이다)에서 밀린 서류 작업에 열중했다. 산불 때문에 공기상태가 좋지 않아 며칠째 창문을 열어두지도 못하고 블라인드를 내려놔서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얼마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딸아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엄마. 공기가 너무 나빠. 숨쉬기가 힘들 정도야. 불이 우리 동네로 오고 있데 그래서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


아이의 문자와 함께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긴급 이메일이 도착했다.

대피상황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예의주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니... 도대체 밖에 상황이 어떤데?'

그제야 방에서 나와 밖을 보니 볼케이노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황토색 연기로 가득 찬 하늘에 마치 눈이 오듯 재가 날리고 있었고, 검고 탁한 공기가 순식간에 코로 들어와 정신이 혼미해졌다. 보통 때 같으면 차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간인데 집 앞 도로는 어딘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자가용들로 소리 없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부랴부랴 학교에 전화를 넣어 아이들을 픽업하겠다고 알린 후 나도 그 자동차 무리에 끼어 아이들 학교로 향했다. 아마도 산불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람 때문에 모든 연기와 재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모양이다.


나처럼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부랴부랴 달려온 차량들을 제외하면 학교 주차장은 거의 텅텅 비어 있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공해 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세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과 1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인데 밖의 공기가 더 둔탁해짐을 눈으로도 폐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대피를 해야 하는구나...' 차의 기름게이지를 확인해 보니 딱 게이지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제스퍼까지는 대피할 수 있겠는데... 혹시 모르니 기름이라도 채워야겠다.'

그런데...

이미 주유소마다 길게 늘어선 차량행렬을 보니 정말 겁이 덜컥 났다. 왠지 이 행렬에 끼어 기름을 넣어야 할 것 같은 생각과, 또 반대로 호들갑 떠는 사람들 무리에 껴서 나까지 흥분할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두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나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설마 대피하겠어? 괜찮아. 바람이 불어서 연기 때문 일 거야.'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불길이 심상치 않은데... 일단 대피문자 없어도 아이들 데리고 제스퍼로 먼저 가있는 게 어떻겠어? 이 연기 많이 마셔서 좋을 것도 없는데, 일단 먼저 떠나."

그런데... 이런 환경속에서도 아이들이 계속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왔다. 부모들이 아이들 레슨까지 보내는 걸 보면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레슨은 다하고 제스퍼로 출발해도 늦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단지 문자로만 보였던 재난알림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마지막 학생을 남겨놓고 재난문자가 또 울렸다.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떠나야 한다. 부랴부랴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주유소로 향했다. 밖에 나와보니 정말 더 가관이었다. 이미 밖은 깜깜하다 못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여기저기 자동차사고가 나서 경찰차 사이렌소리가 요란했다. 고민 없이 주유소로 향했다. 물론 아까보다 훨씬 더 길게 늘어선 줄과 지그제그로 엉켜있는 차들을 보니 후회막심이다. 아까 기름을 넣었어야 했다. 일단 줄을 서서 나의 차례를 기다려 보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반대편에 있던 운전자가 나에게 소리를 친다.


"이 사람들 기름 다 잠갔어! 너 기름 못 넣을 거야. 여기 4개 중에 네 뒤에 있는 한 개만 열려있는 것 같아. "

세상에.... 주유소 주인이 밸브를 모두 잠그고 먼저 대피 한 모양이다. 차에서 내려 바로 내 뒤를 따라오던 뒤차에게 다가갔다. 빨간색 승용차에 머리와 수염이 하얀 백발 할아버지 앉아있었다.


"여기 주유소 주인이 가스밸브를 잠근 것 같아. 지금 이거 한 개만 열려 있다고 하는데 조금만 뒤로 빼줄래?"

내차와 그 할아버지 차가 밸브가 열려있다는 주유기 한대를 사이에 두고 어중간하게 정차해 있었다.

창문이 열리더니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기름 넣고 싶어?? 그럼 뒤에 가서 줄 서! 지금 내 차례야"

옆에 있던 아들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할아버지에게 대들 기세였다. 난 부랴부랴 아들을 막으며 "오케! 너 기름 너!" 하며 아들을 끌고 차로 돌아왔다. 만약 할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총이라도 쏠 눈빛이었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내 맨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자기 먼저 살겠다고 가스밸브를 다 잠그고 간 사람이 인심 좋게 4개의 주유기 중 한대만 풀어놓고 갈 리가 없다, 분명 그 할아버지도 기름을 넣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친구가 조금 떨어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수 있다는 정보를 줘서 우리도 무사히 주유를 마치고 대피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나중에 페이스북을  확인해 보니 몇몇 주유소 주인들의 글이 올려져 있었다.

'우리 주유소 문 열어놨어. 너희가 무사히 다 대피할 안 닫지 않을 거니까 천천히 주유하고 떠나도록해. 우리 모두 무사할 거야.'

같은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두 비즈니스 오너들의 대처방법이었다. 한 곳은 타운 사람들의 인심을 모두 잃었으며, 한 곳은 주유소 기름이 바닥이 날 정도로 장사가 잘돼서 대박이 났다고 한다.



차에 기름이 가득한 걸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운 좋게 제스퍼에서 하룻저녁 아이들을 재울 수 있는 작은방도 예약할 수 있어서 더 마음이 놓였다. 우리가 대피하도록 지정된 곳은 힌튼(Hinton)과 제스퍼(Japer) 두 지역이었다. 힌튼에서 비즈니스를 하시는 한인분들께서 숙소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이미 힌튼에도 매연이 가득했으며 재가 날리고 있는 걸 보니 조만간 이곳도 대피명령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멀리 레드디어(Red deer)에 출장 가 있는 신랑도 우리가 제스퍼로 가있기를 원했다. 힌튼을 뒤로하고 한시간 더 달려 제스퍼에 들어왔다. 이곳의 공기는 아직 숨쉴만 했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야생동물들을 보고있자니 불과 몇시간 전의 상황이 꿈만 같았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캐나다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고민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갔다. 산불이 오래 지속될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더 멀리멀리 긴 피난길에 올랐다. 우리는 레드디어에서 돌아올 신랑만 만나면 이제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았다. 우린 정말 운이 좋았다. 순식간에 제스퍼 시내 호텔이 동이난 상황에서 우린 감사하게 작은 방이라도 예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일, 내일모레는 방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늘하루 우리 가족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꿀잠에 빠질 것 같다. 밤늦게까지 카톡과 메시지가 바쁘게 울려대었다. 모두 무사히 대피했다는 친구들의 안부문자들이 오고 가는 이 알림 소리가 그져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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