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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May 12. 2023

알버타 산불 대피일지

Day 2 : 5월 6일

제스퍼 대피센터

제스퍼 호텔 체크인 밤 10시.

비록 더블침대 두 개의 작은 방이지만 마음속에 자리한이 안정감은 <집>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힘인 것 같다. 아이들이 먼저 씻고 난 뒤 마지막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분명 깨끗하고 하얀색의 욕조였는데 아이들 샤워 후 바닥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산불로 인한 미세먼지를 뒤집어썼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을 먹지도 않았는데 어느 누구도 배고프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저녁 8시 이후 제스퍼로 출발했다는 신랑은 연락이 두절된 지 벌써 3시간이 넘었다. 아마 아이스필드로 돌아오는 길은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곳이니 4시간 정도 서로 연락이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깜깜한밤 로키산을 넘어오는 신랑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응급실


새벽 1시.

큰아이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엄마. 눈이 너무 아파서 눈을 감을 수도 없고 뜨고 있을 수도 없어. 눈 뒤로 뭔가가 잡아당기는 듯이 아프고 눈에도 뭐가 잔뜩 들어있는 느낌이야."

대피할 때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던 큰아이의 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아마도 타운을 빠져나오면서 연기 속 이물질들이 렌즈에 엉겨 붙어 염증을 일으킨 것 같다. 자는 두 아이를 남겨놓고 급하게 응급실로 향했다. 우리 병원의 10분의 1도 안 돼 보이는 작고 아담한 제스퍼 병원의 응급실은 개미소리도 다 들릴만큼 조용했다. 육안으로는 어떤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의사 선생님은 눈을 세척해 보자고 하셨다. 두 시간가량 양쪽눈을 세척하고 나니 아이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아직도 병원으로 이송 중인 환자들이 있어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다며 혹시나 아침까지도 눈에 통증이 계속되면 응급실로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친절한 여의사 선생님이 총총히 사라졌다. 우리 눈에는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만 보였던 제스퍼 병원도 이 새벽시간까지 대피한 환자들 때문에 잠 못 자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온 시간 새벽 3시.

큰 아이가 잠이 들고 새벽 4시가 다되어 갈 때쯤 신랑이 호텔로 들어왔다. 양손에는 빵과 치즈, 우유, 과일, 물 등 혹시나 아무것도 못 먹었을 우리들을 위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신랑을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 어쩌지?', '아마도 영화에서처럼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며 꼭 껴안겠지? 신랑도 울면 어쩌지?'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상상한 우리들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거봐! 내가 대피령 떨어지기 전에 먼저 제스퍼로 가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꾸지람만 들었다.

6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달려오며 얼마나 우리 걱정을 했을까... 그 마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는 꾸지람이었다.


남편도 나도 눈만 감고 있었을 뿐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아침이 되고 늦잠 자는 아이들을 뇌둔채 우리는 제스퍼에 대피본부로 지정된 센터를 방문했다. 혹시나 업데이트된 소식이 있는지, 우리가 도움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센터에는 이미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고 언제든지 대피한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수프, 빵, 과일, 커피, 물,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 둘 아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어르신들, 동네 이웃들, 피아노 학생들 가족.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 다가가 뜨겁게 꼭 포옹을 했다. 간밤에는 어디서 잠을 잤는지,  혹시 잠자리는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서로 도울일은 있는지 가족처럼 서로를 살폈다. 참 다행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꿈같았던 어젯밤을 이야기하며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인증사진도 잊지 않고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이제 모든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었다.



호텔 체크아웃 오전 11시

아무래도 이곳에 3일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제보다 더 탁해진 제스퍼 공기를 보니 불길이 하루아침에 잡힐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산불뉴스로 관광객들이 제스퍼 여행을 하나둘 취소하면서 우리가 머물 수 있는 방이 생겼다. 산불이 잡힐 때까지 이틀 더 머무를 수 있도록 방을 예약했다. 11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4시에 다시 와서 새로운 방으로 체크인하면 된다. 너무 다행이다. 이제 잠잘 곳도 생겼고, 식사는 센터에서 제공해 주니 우리는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연기 때문인지 막내딸은 계속 두통약을 먹고 있었고, 아들은 호흡곤란으로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았다. 큰딸의 눈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훨씬 괜찮아 보였다. 놀란 아이들 마음도 달래줄 겸 우리는 늘 가던 제스퍼 하이킹 트레일을 찾았다. 역시나 이곳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탁한 공기를 제외하면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후 4시

호텔 체크인을 하기 위해 신랑과 함께 호텔 카운터에서 막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하려는 순간 재난문자가 왔다.


불 때문에 힌튼과 제스퍼 전기가 끊길 수도 있으니 밴프나 캘거리 쪽으로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체크인하려는 호텔을 취소하고 차를 돌려 주유소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밴프나 캘거리를 가려면 기름을 단단히 채워야 한다. 가는 곳에 주유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주유소에는 길게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제의 공포가 떠오르며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모린할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린할머니는 오랫동안 에슨에 혼자 사시는 교회에서 알게 된 할머니시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앓고 있었지만 몇 년 전 심하게 넘어지시고 엉덩이 뼈를 수술한 이후로 걸음걸이가 불편하신 72세 어르신이다. 수술 후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경과도 지켜볼 겸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드리려고 일주일에 한 번 그분과 티타임을 가져왔었다.)

 

"진, 나 좀 데리고 나와줘, 갑자기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짐을 싸서 나만 여기에 두고 떠나버렸어. 전기가 끊긴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 좀 데리러 와줘."


너무 당황스러웠다. 분명 이웃분들과 함께 대피한 할머니는 지금쯤이면 밴쿠버에 살고 있다는 가족들이 모시고 가셨어야 했었다. 자세한 상황판단을 위해 신랑은 센터로 가서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했고 나와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시다는 호텔로 달려갔다. 덩그렇게 큰 호텔방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옷가방을 꼭 쥐고 있는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이 자연재난 앞에서는 더욱더 외롭고 작아 보였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고 안심을 하셨는지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셨다. 죄송하지만 그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나의 질문에는 상관없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으셨다. 혼자서 얼마나 무서우셨을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가족과 함께 있는 나도 이렇게 무서우니 말이다. 할머니의 그 긴긴 이야기의 끝은 지금부터 어디를 가든 우리와 함께 가고 싶다는 것, 꼭 함께 데려가 달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할머니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할머니를 버리고 갔다고 생각을 했었다. 할머니의 표현이 "그들이 갑자기 날 버리고 여길 떠났어"였으니 이런 오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을 대피센터에라도 모셔다 놓고 가야지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났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급하게 대피하느라 보청기만 챙기시고 배터리를 미처 챙기지 못하신 것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와 원활한 의사소통이 됐을 리가 없을 테고, 자신의 장애 때문에 몇몇 자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하고만 소통하며 평생을 지내온 분이 이웃에게 시시콜콜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리도 없다. 자존심 세고 고집불통인 할머니가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따라 긴긴 대피길에 오를리가 없다. 그렇다고 아쉬운 소리로 어디에 데려다 달라고 이야기도 안 하셨을 것이다. 딸아이가 제스퍼 약국에 전화를 돌려 할머니 보청기에 맞는 배터리를 사다 드렸다. 가장 큰 의사소통의 문제점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동문서답이 계속되었다. 순간 할머니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으셨나 걱정이 되었다.


"모린, 혹시 배터리 안 꼈어?"

"어?? 배터리? 배터리가 너무 비싸서..."


배터리가 비싸서 아끼신다고... 아놔... 순간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냥 끼시지 쫌!"

할머니가 주섬주섬 배터리를 꺼내시더니 보청기에 넣으신다. 72세 모린할머니가 한국말도 이해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다행히 전기가 끊길 위험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불은 피해 갔고 30분도 안돼서 제스퍼에 머물러도 안전하다고 대책 위원회가 발표를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모린할머니는 안전하지 않았다. 다시 호텔을 예약하고 싶어도 제스퍼 어느 곳에서도 성인 세명에 아이 셋이 머무를 호텔은 이제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또 언제 다시 제스퍼를 떠나라는 재난문자를 받게 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밴프로 이동하자니 하룻밤에 호텔비가 330불(30만 원이 넘는 비용)이 넘는 호텔들만 남아있었고, 우리가 할머니 호텔비를 대신 내주지 않는 이상 할머니에게 그 큰 비용을 부담하게 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6시간 떨어져 있는 림비(Rimbey)라는 작은 시골마을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 타운에서 대피하신 한인 가족분들이 머무르고 계셨기에 우리가 잘 수 있는 방을 구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이렇게 우리는 또다시 긴긴 자동차 여행길에 올랐다. 이 멋진 로키산의 아이스파크웨이 길을 이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달려본 건 처음이었다. 멋진 자연경관을 보며 웃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고 말로는 서로 "우리 이 기회에 자동차 여행 한다고 생각하자!"라고 이야기했지만 마음껏 웃고 멋진 자연에 감탄하며 여행할 수 없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저녁 11시. 비에 도착했다.

림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시는 한인분께서 우리를 위해 늦은 시간 얼큰하게 라면을 끓여주셨다. 갈비탕라면! 이렇게 얼큰하고 구수하고 맛있는 라면은 처음 먹어보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가족들도 마치 이산가족 상봉하듯 서로를 끓어앉았다. 코로나 이후로 문을 닫고 있었던 모텔을 우리 가족을 위해 다시 전기를 넣으시고 화장실 물을 연결하셨다. 틈틈이 인스타에 나의 상황을 포스팅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걱정의 메시지를 남겨주시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오셨다.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메시지에 진심 어린 걱정과 염려의 마음이 전해졌다. 우리는 이제 에드먼턴으로 가려고 한다. 불길이 잠잠해졌을 경우 타운으로 돌아갈 가장 빠른 길이며, 또 한인분들도 많이 계시고 장기간 체류했을 경우 저렴한 호텔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인분들과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눌동안 모린할머니는 깊은 잠에 빠지신 것 같다. 그 와중에 반신욕까지 하셨다니 우리와 함께 있는 할머니 마음이 불편하시지는 않은 것 같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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