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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May 14. 2023

알버타 산불 대피일지

Day 3 : 5월 7일

에드먼튼에 들어오니 며칠간의 일들이 모두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눈에 익은 지역에, 눈에 익은 건물들. 모두가 바쁘게 하루일상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떵그러니 우리 가족들만 그들 세계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불시착한 느낌이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했던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할머니께도 같은 층 킹 침대와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을 예약해 드렸다. 호텔 라운지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궁금해졌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집이 아닌 이곳 호텔에 머무르는 것일까?"

"이들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방을 배정받는 동안 이들의 속사정이 궁금해졌다. 맘이 어지간히 편해졌나보다.


대충 방안에 짐을 들여놓고 우리 가족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한인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모린 할머니께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한국 음식을 소개하겠다며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식당으로 향했다. 안도감 때문일까?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니 이제야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에 앉자마자 속이 더부룩 해져왔다. 뭔가 이 속을 뻥 뚫어줄 얼큰한 국물이 필요했다. 평소에는 매워서 먹지도 못하는 해물 순두부찌개를 시켜서 밥도 없이 국물만 연신 흡입했다.

밥을 먹다가 신랑이 막내딸의 손등에 상처를 발견했다.


"어!!! 수야. 손등에 이 상처 뭐야? 넘어졌어? 다쳤어? 언제 그런 거야?"

그리고 보니 아이의 왼쪽 손등 전체가 피딱지로 덮여 있었다.

"아... 이거... 내가 그런 거야."

당황한 아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내가... 우리 대피하는 날... 너무 무서워서 손으로 긁었나 봐. 나중에 보니까 이렇게 상처가 났더라고..."

남편이 딸아이 손을 꼭 잡고 다독였다.

"엄마도 있었고, 언니 오빠도 있는데 뭐가 무서워..."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함께였지만 혼자 무서움에 떨었을 딸아이한테 너무 미안했고, 그런 아이의 마음을 3일이 지나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아이가 이렇게 심하게 자해를 할 만큼 공포를 느꼈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왜 따뜻하게 안아주고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지 못했을까?

남의 자식 걱정에 카톡을 돌리고, 학생들 걱정에 그들의 안부를 묻는 문자만 열심히 돌렸지 내 새끼 걱정할 줄 모르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엄마였다.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평소에도 늘 차분하고 말이 없는 딸이기에 그날도 덤덤하게 침착하게 잘 견디고 있는 거라 생각했었다. 바보같이...

대충 감정을 추스르고 벌겋게 충혈된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다.


오랜만에 한 상 차려진 한국음식에 가족들 모두 행복한 모습이었다. 식사 후 팥빙수로 달달하게 놀란 가슴을 달랠 때에도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우리 아이들이 웃고 있어서 다행이다. 무사히 에드먼턴까지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늦게라도 우리 막내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렇게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인정한다. 이번 산불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아이들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그 두려운 마음을 살펴줄 여유도 없이 너무 흥분했고 침착하지 못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겠지만 분명 앞으로도 이런 뜻밖의 사건 사고들이 일어날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나에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틈틈이 대피상황을 인스타에 올렸다. 많은 분들이 피드를 보시고 걱정해 주시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사실 대피령이 떨어졌을 때 고민 없이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많이 부러웠다. 정작 한국의 가족들에게는 걱정하실까 봐 알리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피드의 댓글을 통해 위로와 힘이 받는 나 자신에 많이 놀라기도 했다. 이런 것이 소통의 힘인가 보다. 그분들의 한마디 댓글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니... 앞으로 피드에서 위로가 필요한 분들, 용기가 필요한 분들, 축하가 필요한 분들이 있다면 꼭 나도 잊지 않고 댓글로 함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사자에게는 그 한 줄의 댓글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에드먼튼에 도착했다는 피드를 보고는 몇몇 분들이 개인메시지로 연락을 주셨다. 혹시나 거처를 구하지 못했을 경우 잘 곳을 알아봐 주시겠다고 하시는 분들, 김치라도 가져다주시겠다고 하시는 분들,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달라고 하시는 에드먼턴에 거주하시는 인친님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따뜻한 메시지가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짐이 되지 않겠노라 다짐이라도 하신 듯 할머니는 걱정되리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셨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비틀거리면서도 나의 손에 기대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침대에 누워 쉬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사실 할머니가 아이폰을 사용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 집에 있는 유선전화기로 사람들과 소통하셨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티브이 뉴스나 라디오를 통해서 접하셨다. 몇 달 전 문자 메시지 받는 법과 사진 주고받는 법을 배우고 난 후 그나마 아이폰이 할머니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항상 집에 보관용으로 두고 다니셨던 아이폰이 이번기회에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다. 아이폰을 통해 전달되는 오래된 친구들의 안부소식을 확인하는 게 지금 할머니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 같았다.


불길이 타운을 피해 갔다는 뉴스가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다. 월요일 8일에 타운으로 복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공지사항도 올라왔다. 하지만... 신랑과 타운 몇몇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안전해 보여도 불이 완전히 제압되지 않는 한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우리는 다시 나와야 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설득해서 하루 더 에드먼튼에 머물기로 했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이렇게 집나온지 3일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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