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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Jul 23. 2023

쉿! 잘 쉬었다 갑니다

완벽한 야반도주

양쪽눈이 축 처진 곰돌이 푸우 같은 착하디 착하게 생긴 어린 청년이 지하유닛의 식구로 들어왔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온 30대 초반 청년이었다. 건장하고 훤칠한 금발머리의 조쉬아(Joshia)는 튼튼한 외모와는 달리 머리를 크게 다쳐서 뇌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말과 행동이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아픈 몸을 다독여가며 캐나다에 정착하려는 조쉬아의 모습에서 아마도 신랑은 자신의 이민초기의 외롭고 힘들었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잔디 깎기, 눈 치우기 등 집안의 잔잔한 일들과 하우스 외부 관리를 조쉬아에게 의뢰하고 매월 렌트비 일부를 관리비용으로 돌려주었다. 

어느 날 신랑이 흥분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신랑 : 조쉬아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데. 미국에서 데려올 거래. 함께 살아도 되겠냐고 메시지가 왔네. 


나 : 정말? 뭐라고 대답했어?


신랑 : 당연히 된다고 했지. 여자 친구도 돌보야 하니까 더 건강해져서 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이야기하던데? 우리 집에서 잘 정착해서 둘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네. 돈도 많이 벌어서 집 딱! 사서 나가면 얼마나 좋겠어? 성실하니까 뭐든 잘할 거야.


나 : 그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조쉬아의 여자 친구가 캐나다에 오고(사실 여자 친구를 한 번도 만나본적은 없다. 여자 친구 역시 조쉬아처럼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해 추웠던 겨울이 지나갔다. 

  


한 번도 렌트비를 밀린 적이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조쉬아의 렌트비 입금날이 일주일이 지났다. '식구가 한 명 더 늘었으니 렌트비 내기도 빠듯하겠지'라는 안쓰러운 생각에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윗집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조쉬아 위층 유닛에 살고 계신 우리의 또 다른 세입자 할머니다)


할머니 : 조쉬아 이사 나갔는데 너희 왜 인스펙션 하러 안 오니?


신랑 : 네? 누가 이사를 나가요?


할머니 : 조쉬아 지난달 말에 이사 나갔잖아. 집안 청소를 안 하고 나간 것 같은데 와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퇴근 후 신랑과 함께 부랴부랴 에드먼턴 집으로 향했다. 상기된 얼굴로 들어오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할머니가 조곤조곤 혼잣말인지 우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억양과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 : Oh my God. 모르고 있었나 보네. 어쩐지 이상하게 밤에 급하게 이사를 하는 것 같더니만 도망간 거구만...


할머니 말로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이상한 점도 없었다고 한다. 단지 그날 밤 분주하게 트럭으로 짐을 몇 번 옮겨실더니 그냥 가버렸다고 했다. 


조쉬아가 쓰던 우리의 지하 유닛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깔끔했던 그의 부엌은 맥주캔과 술병들로 가득했고, 제대로 된 밥을 만들어 먹은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캐나다에 있는 모든 패스트푸드를 섭렵이라도 하듯이 온갖 브랜드의 포장지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먹었어도 20킬로는 족히 살이 쪘을 것 같은 음식들이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조용히 앉아 티브이를 보았던 거실의 카우치와 소박하지만 단단해 보였던 커피테이블은 이미 테이블의 사이즈를 훌쩍 넘어 바닥 카펫으로까지 흘러 버린 피다 만 담배꽁초와 담배제로 소복이 덮여있었다. 참고로 우리 집은 No pet, No party, No smoke 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쉬아는 건강문제상 담배와 술을 하지 못했다. 

침실은 더 가관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리긴 했었나 보다. 티브이, 침대, 전자레인지, 인스턴트팟, 토스트기 등온갖 가전제품들의 박스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제발 화장실만은 무사하길 바랐으나 역시나 화장실 변기는 꽈악 막혀있었고, 거울은 너덜너덜 깨진 피스들이 저마다의 끝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벽에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변기를 뚫으려고 무슨 짓을 하긴 한 모양이다. 철 수세미로 쑤셨을까? 변기 안쪽에 지울 수 없는 스크레치들 때문에 마치 100년은 족히 된 골동품 변기처럼 변해있었다. 하얀 세면대와 욕조는 얼룩덜룩 알 수 없는 페인트에 물들어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 조쉬아... 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거니..."


물론 조쉬아는 연락을 끊었다. 처음 랜트 계약 시 조쉬아의 레퍼런스를 해주었던 목사님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본인도 조쉬아를 못 본 지 오래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렇게 실망감과 배신감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겨둔 채 청년은 하룻밤 사이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까지 동원해 우리 가족은 하루 꼬박 청소를 했다. 아키아에 가서 새로운 화장실 거울을 달고, 플럼버를 불러 막힌 화장실과 부엌 하수도도 시원하게 뚫었다.

깨끗해진 집을 보니 어느 정도 화가 풀리는 듯했다. 머리를 다쳤다더니 상식이라는 게 인지가 안 되는 장애가 생겼던 건 아닐까? 괜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 상황을 합리화해보려고 했다.

쓰레기도 다 비웠건만 집안 어디에서도 집키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현관문 열쇠와 방문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뭐야. 이 자식! 열쇠도 가져간 거야?"

열쇠를 다시 다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부글부글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조쉬아보다는 여자 친구를 향해 분노의 화살머리가 향하는 건 왜일까...

청소로 이미 지쳐버린 몸은 그 작은 열쇠조차 들고 있을 힘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에 와서 열쇠를 바꾸기로 하고 4시간 같은 2시간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고 신랑과 나는 집열쇠를 바꿔달기 위해 에드먼턴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몬에 소름이 쏴악 끼쳤다.

거실 바닥에 가지런히 열쇠 두 개가 놓여있었다. 조쉬아가 다녀간 것이다. 한 글자 메모한 장 없이 딸랑 열쇠두 개를 거실 바닥에 두고 갔다. 우편함에 놓고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위층 할머니도 조쉬아가 다녀간 걸 모르고 있었다. 밤에 조용히 다녀간 것이다. 자신이 조용히 나갔던 것처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열쇠 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냅다 열쇠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깨끗해진 내 집이 다시 더러워진 느낌이었다. 

같은 이민자로서 마음으로 응원하고 신경을 썼던 신랑의 실망감은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너무 사람을 믿지는 말자. 진짜 속상하다...아프다..." 

난 알고 있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또 조쉬아 같은 사람이 살 곳을 찾는다면 우리 신랑은 방문을 열어 줄 거라는 걸...


완벽한 야반도주는 이런 거구나! 잘 봤다 조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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