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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Aug 14. 2023

부엌 캐비닛의 비밀

캐나다에서 집주인 아줌마 되기


에드먼튼에 세컨드하우스로 구입한 집은 197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집이다. 어떤 분이 집을 건축하셨는지 참 궁금하다. 처음 집을 봤을 때 신랑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네모 반듯한 외관이었다고 한다. 어디 하나 삐둘어 지지 않고 모든 공간이 네모 반듯한 모습이 참 튼튼하고 단정해 보였다고 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잘 몰랐었다. 이 집의 문 사이즈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2000년대 집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 익숙하지 않은 느낌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넘겨버렸다. 

세입자의 부주의로 방문이 파손되어 새로운 문으로 교체해야 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 집 문 사이즈가 시판되는 문들과 다르다는 걸 말이다. 창문에도 규격이 있고, 문에도 규격이 있는 거 아니던가? 

아무리 인터넷을 뒤지고 매장을 방문해도 같은 사이즈의 문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하로 들어가는 문은 필요 없으니까, 지하문을 떼어내서 방에 설치하자."

그때 알았다. 우리 집 모든 문의 사이즈가 다 다르다는 걸... 심지어 문에 설치된 손잡이 높이도 다 달랐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방문 손잡이가 고장 나서 손잡이를 교체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그때 알았다. 우리 집 손잡이도 아주 귀한 제품이었다는 걸... 손잡이 내치볼트 길이가 기존 제품보다 짧아 레치 고정판까지의 거리가 기존제품과 많이 달랐다. 결국 손잡이를 시판되는 제품으로 교체하려면 문을 바꿔야 했다. 이 오래된 집은 모든 공간이 각자의 크기에 맞게 맞춤 제작된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세입자들이 이사를 가고 나면 항상 문이 멀쩡한지 제일 먼저 체크하게 되었다. 이 오래된 문이 이렇게 귀할 줄이야...


캐서린이라는 태풍이 훑고 지나간 처참한 공간을 레노베이션하면서 이번에는 모든 문들을 규격사이즈로 바꾸었다. <캐서린 스토리 https://brunch.co.kr/@0d1c28c8fb6c49f/55 >

문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들였을 건축가 분께 죄송한 마음이지만 속이 다 후련했다. 이제 희귀한 문으로부터 해방이다!

오래된 부엌의 케비넷도 모두 뜯어냈다. 이제 이곳도 현대식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1970년대에서 2023년으로 멀리뛰기를 해야 할 시간이다.

캐비닛 제거 작업을 끝낸 죤이 신랑에게 남긴 이야기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머물렀다.


"케비넷 나무 버리기 너무 아깝더라. 최고의 나무였어. 너무 재미있지 않니? 올드 케비넷은 최고급의 나무였지만 아주 싸구려처럼 볼품없어 보이고, 우리가 주문해 놓은 아키아 캐비닛은 싸구려 나무지만 엄청 세련되고 고급스럽게 보인다는 게 말이야." 

이런 말을 남긴 걸 보면 아마도 작업을 하는 동안 죤도 많은 생각이 오고 갔던 것 같다.

우리가 그처럼 애물단지처럼 생각했던 문도 캐비닛과 같은 나무였다. 죤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면 내 기억 속 문들과 올드 케비넷은 그저 오래되고 흠많고 실용성 없었던 기억들로 뭉텅 그려 함께 버려졌을 것이다. 훌륭한 재료를 사용해서 조금만 융통성 있게 설계했더라면 더 사랑받았을 텐데, 더 오래 이 집과 어울려 세월을 함께 했을 텐데 말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 하나 없이 쓰레기가 되어버린 오래된 캐비닛에게 자꾸 감정이입이 된다. 번쩍번쩍 세련된 색감의 저가 케비넷을 보고 사람들은 예쁘다고 쓰다듬고 만족해할 텐데 억울할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때로는 고집스러움 보다 융통성 있게 나를 드러내는 것도 나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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