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태어난 두 남자의 탈출기
《편안함의 습격》과 라캉이 밝힌 무의식의 진실
운명이라는 이름의 감옥
"아버지, 삼촌, 조카가 모두 감옥에 있었다. 나는 언젠가 일찍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편안함의 습격(The Comfort Crisis)》의 저자 마이클 이스터의 실제 고백이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건강 전문가인 그가 자신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세상에 공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터는 **"타자의 욕망"**에 완전히 지배당한 존재였다. 가족의 운명이라는 상징적 질서(Symbolic Order) 안에서 그는 이미 자신의 미래를 각본대로 써버렸다. "나도 언젠가는..." 이 무의식적 확신이 바로 자기실현적 예언의 시작이었다.
2024년 어느 토요일 오전 7시 23분,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옥에서 눈을 떴다. 6.1인치 스마트폰 화면이라는 투명한 감옥.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를 습관적으로 스크롤하는 내 모습은 이스터가 술병을 집어드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각각 다른 시대, 다른 방식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무의식의 구조는 동일했다.
무의식이 반복하는 가족의 서사
이스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대를 이어 자기파괴의 길을 걸었다. 라캉은 이런 현상을 **"무의식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되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이스터의 알코올 의존은 단순한 중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족의 상징적 유산을 무의식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배신, 삼촌의 범죄, 조카의 일탈...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기표(signifier) 사슬을 이루며 이스터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내 경우는 어땠을까? 가족 중에 감옥에 간 사람은 없었지만, 나만의 상징적 감옥이 있었다. 10년째 반복되는 디지털 중독의 패턴. 매일 아침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잠들기 전 마지막 스크롤로 끝나는 하루.
라캉이 말한 **"결여(manque)"**가 바로 이것이었다. 뭔가 중요한 메시지가 있을 거라는 기대, 새로운 자극에 대한 갈망,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결핍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타자의 욕망에 조종당하는 현대인
이스터가 《편안함의 습격》에서 폭로한 **'결핍의 고리(Scarcity Loop)'**는 라캉의 욕망 이론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기회의 발견 → 라캉의 '결여'
예측 불가능한 보상 → **'대상 a(objet petit a)'**의 환상
즉각적 반복 가능성 → 욕망의 메토니미적 구조
라스베이거스의 블랙파이어 이노베이션에서 시저스, 인텔, LG 등 73개 거대 기업이 연구하는 것은 결국 타자의 욕망을 어떻게 주입할 것인가였다. 슬롯머신에서 1달러를 걸고 50센트를 따도 승리 음악이 나오는 **'승리의 탈을 쓴 패배'**는 라캉이 말한 상상계(Imaginary)의 함정 그 자체다.
내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알림이 올까?"라는 기대는 사실 **"타자가 나를 원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의 변형이었다. 카톡, 좋아요, 댓글... 이 모든 것들은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다.
두 개의 극한에서 만난 실재계
하지만 2018년, 이스터의 인생을 바꾼 33일이 시작되었다. 알래스카 북극권, 영하 40도의 지옥에서 그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했다.
같은 해 가을, 나는 해발 1,200미터 봉정암으로 향했다. 이스터의 33일에 비하면 고작 33시간이었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극한이었다.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둘 다 상징계의 보호막이 사라진 **실재계(Real)**와 직접 마주한 것이었다. 이스터에게는 문명의 모든 편의시설이, 나에게는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실재계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순수한 경험의 영역. 영하 40도의 추위도, 경사 45도의 산길도 어떤 기표로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날것의 경험이었다.
신체 증상으로 말하는 무의식의 진실
"혹시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상원사를 지나며 내가 느낀 공포는 단순한 신체적 피로가 아니었다.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무의식이 신체 증상을 통해 보내는 메시지였다.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의 나는 죽어야 한다"**는 무의식의 메시지였다. 편안함에 중독된 가짜 자아가 해체되어야만 진짜 주체가 출현할 수 있다는 것.
이스터 역시 북극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의 무의식은 다른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알코올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것이다. 진짜 위험 앞에서는 가짜 위안이 필요 없었다.
배터리가 꺼진 순간의 해방
봉정암까지 남은 1km 지점에서 스마트폰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었다. 갑자기 손에서 사라진 6.1인치 화면. 그 순간 나는 10년간 상징계에 가려져 있던 실재계와 마주했다.
500년 된 전나무의 거친 껍질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이것들은 더 이상 인스타그램에 올릴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언어 이전의 순수한 감각, 상징화되기 이전의 실재였다.
이스터도 북극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 평소 하루에 수십 번씩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습관적 손동작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감각들이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로 날씨를 예측하고, 동물 발자국으로 방향을 찾고, 별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했다.
20퍼센트의 진실과 주체의 탄생
북극에서 이스터가 발견한 **'20% 법칙'**은 라캉의 주체 이론과 정확히 연결된다. "인간의 뇌는 실제 한계보다 훨씬 일찍 포기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실제 능력의 20%만 사용하고도 '불가능'이라고 착각한다."
라캉은 신경증자가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으로 오인한다고 말했다. 이스터는 가족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착각했고, 나는 타자가 제공하는 편안함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서 우리는 진짜 주체와 만났다. 영하 40도에서 살아남는 이스터, 해발 1,200m에 도달한 나. 이때의 우리는 더 이상 타자의 욕망에 조종당하는 분열된 주체가 아니었다.
차 한 잔에 담긴 상징적 의미
스님께서 건네주신 차 한 잔이 평생 마신 차 중 가장 달콤했던 이유를 라캉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가 일치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마시는 차는 대부분 기표로만 존재한다. 브랜드, 가격, 분위기 등의 상징적 의미들이 실제 맛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봉정암에서의 차는 달랐다. 그것은 순수한 기의, 즉 실제 갈증을 해소하고 피로를 달래주는 진짜 의미 그 자체였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차를 마실 자격을 얻었다는 점이다. 라캉은 자격을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인정받는 과정이라고 봤다. 나는 고통을 통과함으로써 진짜 만족을 누릴 주체적 위치를 획득한 것이다.
증상을 관통하여
이스터는 북극에서 33일을 보내고 문명으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알코올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라캉의 용어로 표현하면, 그는 **증상을 관통(traverser le symptôme)**했다. 가족력이라는 증상에 갇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던 패턴에서 벗어나 주체적 선택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 역시 봉정암에서 돌아온 후 비슷한 변화를 경험했다. 아침 첫 1시간 스마트폰 금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이용, 배달 주문 전 10분 기다리기... 이런 작은 실천들은 타자의 욕망에서 자신의 욕망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편안함이 당신을 죽이고 있다
《편안함의 습격》에서 이스터가 던진 이 메시지는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편안함은 단순히 신체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소거시킨다.
에어컨, 엘리베이터, 배달음식, 스마트폰... 모든 것이 우리를 실재계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하지만 그 보호가 과도해지면, 우리는 분열된 주체로만 존재하게 된다. 타자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진짜 욕망을 잃어버린다.
감옥에서 나온 두 남자
감옥에서 태어난 마이클 이스터와 스마트폰 감옥에 갇힌 나. 우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타자의 욕망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스터는 북극 33일을, 나는 봉정암 33시간을 통해.
중요한 것은 탈출 자체가 아니라 탈출 후의 삶이다. 라캉은 **"Che vuoi?"(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의 진짜 의미가 **"나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제 안다. 진짜 자유는 편안함을 거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 위치에 서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재계의 충격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감옥에서 태어났지만 감옥에서 죽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타자의 욕망에 계속 조종당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욕망을 찾아 진짜 주체가 될 것인가.
이스터와 내가 각각 북극과 봉정암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선택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당신 안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