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우빈이 비인두암 투병 중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백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성공한 스타가 왜 사람들을 멀리했을까. 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상담실을 찾는 20대 여대생들도 비슷하다. 겉으로는 밝고 사교적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다. 친구는 많은데 진짜 친구는 없다고 한다.
이유섭 교수의 『현대인의 심리분석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트라우마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현재의 관계를 지배한다. 그게 요즘의 현실이다.
버림받기 전에 먼저 떠난다
일곱 살 소녀가 엄마를 찾아 헤맸다. 아빠와 싸우고 집을 나간 엄마. 지쳐서 돌아왔더니 엄마는 대문 뒤에 숨어있었다. 날 지켜보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 배신감이 상처가 되었다. 프로이드가 말한 트라우마란 충격적 경험이 무의식에 저장되어 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심적 외상이다.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계속 작동한다.
이유섭 교수는 "트라우마는 개인이 겪는 나이나 상황에 따라 충격의 정도가 다르다"고 했다. 20대였다면 별일 아니었을 일이 일곱 살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그 나이에 엄마는 우주의 전부니까.
실제 상담실에서 만난 한 여대생이 있었다. 친구들과 여행 계획을 짜다가 갑자기 "나 안 갈래"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 싫어졌어"라고만 했다. 진짜 이유는 달랐다. 너무 친해지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친구들이 날 좋아한다는 걸 느낄 때가 제일 무서워요." 그녀의 고백이다. 사랑받을수록 불안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그럼 차라리 내가 먼저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내담자는 항상 관계를 3개월에서 끊었다. 왜 3개월이냐고 물으니 "그때쯤 되면 상대가 날 알게 되잖아요. 진짜 나를 알면 실망할 테니까"라고 했다.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리는 것. 그게 그녀의 생존전략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은 한 청년도 비슷했다. 여자친구와 사귈 때마다 일부러 싸움을 걸었다. "어차피 떠날 거잖아요. 그럼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게 낫죠." 상처받지 않으려고 상처를 주는 아이러니.
이유섭 교수는 이런 행동을 "방어적인 정신심리적 활동"이라고 불렀다. 과거의 충격을 다시 당하지 않으려고 미리 회피하는 것이다. 마치 한 번 화상을 입은 사람이 불을 무서워하듯이.
하지만 그 방어가 오히려 고립을 만든다. 친구를 피하다 보니 정말로 혼자가 된다. 외로움을 피하려다 더 외로워지는 역설. 그게 트라우마의 잔인함이다.
마음이 보내는 신호들
친구를 사귀다가 갑자기 연락을 끊는다. 상대는 당황한다. 왜 그러냐고 묻지만 본인도 모른다. 그저 불안할 뿐이다.
라캉이 말한 반복강박이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되풀이하는 충동이다. 버림받은 상처를 피하려다 오히려 그 상황을 반복해서 만든다. 마치 상처를 계속 긁는 것처럼.
무의식은 모르스 부호처럼 신호를 보낸다. 꿈에서 혼자 남겨지는 장면이 반복된다. 영화에서 이별 장면만 나오면 눈물이 난다. SNS에서 친구들 사진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몸도 신호를 보낸다. 친구와 약속이 있는 날이면 배가 아프다. 모임에 가면 두통이 생긴다. 마음이 몸을 통해 "위험해!"라고 외치는 것이다.
한 내담자는 친구가 5분만 늦어도 "역시 날 무시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카톡 답장이 늦으면 "이제 날 싫어하나 봐"라고 단정했다. 모든 게 버림받을 신호로 보였다.
상담실에서 본 또 다른 여대생은 친구들과 있을 때 항상 가면을 쓴 것 같다고 했다. "진짜 나를 보여주면 날 떠날 거예요. 그래서 항상 밝고 재미있는 사람인 척해요." 하지만 그 가면이 더 피곤하다.
어떤 이는 선물 공세로 친구를 붙잡으려 한다. 밥을 사고, 선물을 주고, 무엇이든 들어준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하다. "내가 주는 게 없으면 날 버릴 거야"라는 공포.
이유섭 교수가 말한 것처럼 "머릿속에서는 그 괴로운 사건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숨기고 방어하며 억누르는 활동을 한다." 하지만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틈만 나면 튀어나온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질수록 불안이 커진다. 상대가 진짜 나를 알게 될까 봐. 내 상처를 발견할까 봐. 그래서 차라리 표면적 관계에 머문다. 안전하니까.
상처를 극복하는 길
회복의 시작점은 자각이다. "아, 내가 엄마한테 받은 상처 때문에 친구들을 밀어내는구나." 그 깨달음이 첫걸음이다.
위니코트가 말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안전함을 느끼는 심리적 능력이다. 엄마가 없어도 괜찮다는 확신. 친구가 떠나도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
이유섭 교수는 "앎이 곧 증명이 되고, 증명은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준다"고 했다. 어린아이 장난감인 줄 알면 어른은 그것에 놀아나지 않는다.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알면 자유로워진다.
한 내담자는 일 년 동안 같은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는 연습을 했다. 불안해도 도망치지 않았다. 연락을 끊고 싶을 때마다 "이건 일곱 살 나의 공포야"라고 되뇌었다.
처음엔 힘들었다. 친구와 만날 때마다 손에 땀이 났다. 집에 오면 진이 빠졌다. 하지만 조금씩 견뎠다. 한 달, 두 달, 석 달...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이 줄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 친구가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 힘들었구나"라며 안아주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엄마는 아니라는 것을.
또 다른 내담자는 용기를 내어 친구에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놨다. "나 사실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먼저 도망쳐." 친구는 놀라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난 안 떠나."
그 순간이 전환점이었다. 상처를 드러냈는데 거부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받았다. 그게 진짜 관계의 시작이었다.
이유섭 교수의 말처럼 "자신이 행동하는 원인을 잘 알아내면, 문제의 원인을 치유할 수 있다." 무의식의 패턴을 의식화하는 것. 그게 회복의 열쇠다.
한 여대생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불안할 때마다 기록했다. "오늘 A가 약속을 취소했다. 나는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A는 정말 일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기록이 쌓이면서 패턴이 보였다.
상처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불안이 올 때 "아, 또 시작이구나"라고 거리를 둘 수 있다. 그게 성장이다.
트라우마는 평생 간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을 수 있다. 상처는 흉터가 되고, 흉터는 이야기가 된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혼자가 아님을 안다.
그게 친구의 의미다. 내 상처를 알아주는 사람. 그래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런 친구 하나면 충분하다. 온 세상을 얻은 것 같다.
참고문헌: 이유섭(2018). 현대인의 심리분석 에세이. 서울: 박영스토리. 8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