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불편한 감정,늘 남의 얼굴을 하고 찾아올까?

by 홍종민

영영 타인에게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라는 말은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고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생존이 불가능하다. 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누군가에 대한 극단적 혐오에 시달리는 사람 천지다. 뛰어난 이성이나 강한 의지가 없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마음의 평화를 지켜주는 방법이 한 가지는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근래에 조용하고 빠르게 확산하는 현상 중 하나가 타인에 대한 지나친 반감이다. 의료진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런 극단적 감정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걸 피부로 실감한다. 출근길 버스에서 만난 40대 남성이 동료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노가 휘발유 없는 자동차처럼 공허했다. "저 사람은 늘 누군가를 질투하고 뒷담화만 한다"며 이를 갈면서도, 정작 본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뒷담화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김서영 교수의 말처럼 "너무 싫은 것, 낯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익숙하고 친숙한 느낌이 든다면 그건 내부와 관련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김서영, 2024: 147). 일종의 법칙이다.


내 안에서 폐지된 것이 택배 배달원처럼 되돌아올 때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 중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건 '마음의 탐정'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무거운 별칭이지만 그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거의 전부이기도 하다. 현장 상담전문가로서 내가 가진 결정적 무기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관찰력이다. 관찰력은 힘이 세다. 강한 위력을 지닌다.

동네 카페 사장님을 3년째 관찰하면서 투사의 본질을 목격했다. 이 사장님이 새로 온 직원에 대해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저 사람은 일할 때 성의가 없어. 대충대충 하려고만 한다"며 계속 불평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건, 정작 사장님 자신이 오후 2-4시 사이에는 거의 휴대폰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뒷정리도 직원에게 맡긴 채 먼저 나가는 일이 잦았다.

여기서 번쩍 깨달았다. 김서영 교수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설명한 투사는 우리가 아는 것과 1밀리미터도 다르지 않다. 아니, 완전히 다르다. 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폐지하고 추방한 것이 외부에서 다시 나타나는 과정이다. 바로 여기가 포인트다.

사장님이 견딜 수 없어했던 '성의 없음'은 사실 본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카페를 성실하게 운영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점점 대충하고 싶어지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대충하고 싶은 마음'을 마음 밖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그게 사라지지 않고 직원의 모습을 하고 택배 배달원처럼 먼 길을 떠나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거다. 별반 다르지 않다.


조용한 파괴에서 시끄러운 회복까지의 필연성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하는 27세 청년, 이 케이스야말로 투사의 교과서다. 새벽 12시쯤 편의점에 들르면 손님이 거의 없어서 종종 대화를 나눈다. 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가장 극도로 혐오하는 타입이 "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저런 사람들 보면 답답해 죽겠어요"라며 치를 떨었다.

그런데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이 청년 자신이 3년째 똑같은 일을 하면서 특별한 계획 없이 지내고 있지 않은가. "저는 언젠가는 뭔가 해낼 거거든요"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물어보면 애매했다. 사회와 단절된 채 야간 근무를 하면서도 스스로는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낮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저런 한량들'이라며 비난한다.

김서영 교수의 말처럼 "질투심이 많은 사람, 그리고 배우자를 속인 사람은 나였죠. 그 생각을 폐지하고 털어버렸는데, 내가 없애버린 것들이 마치 나를 공격하듯 외부에서 내게 달려듭니다"(김서영, 2024: 148). 딱 이거다, 정확히.

자신이 추방한 '무기력함', '방향성 없음'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는 거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이유 없이 부아가 치미는 거다. 발췌문에서 김서영 교수가 인용한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이런 투사는 생존 전략이다. 너무 고통스러운 진실을 견딜 수 없을 때, 마음은 그 부분을 조용히 추방해버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버텨보는 거다. 확실한 건 이거다.


리비도가 되찾는 소원의 절대 법칙


그런데 신기한 건, 카페 사장님에게 전환점이 왔다는 거다. 어느 날 그 직원이 실수로 커피를 쏟았을 때, 평소 같으면 "역시 성의가 없어서 그래"라고 했을 텐데 완전히 다르게 반응했다. "괜찮다, 나도 그런 적 있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모든 게 연결됐다.

"제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가끔 일이 재미없을 때가 있거든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자신의 '일에 대한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순간, 직원이 적이 아니라 똑같이 힘들어하는 동료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본질이다.

편의점 청년은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게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한 번은 무의식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저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본인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자신의 '방향성 없음'이 의식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는 거다. 여전히 "저는 다르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지만 말이다.

김서영 교수가 말했듯 "내가 포기했던 내 삶의 대상들에 눈을 돌리는 순간 다시 대상이 리비도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생각은 내 안으로, 그리고 에너지는 내 생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죠"(김서영, 2024: 149). 바로 여기다. 투사를 통해 추방했던 자신의 일부를 다시 찾아오는 과정은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조용한 과정과 시끄러운 과정 중 후자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그때부터 진짜 에너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소통의 길이다. 예외가 없다. 줄어들 수 없다.


김서영(2024). 한 사람을 위한 정신분석. 서울: B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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