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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말의 끝에서 시작되는 여행

by 홍종민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말은 항상 나에 대해 알고 있다.” ― 자크 라캉


완결이 아닌 재시작

『말 속의 무의식 ― 라캉식 언어 분석의 기술』을 다 읽은 지금, 당신은 책장을 덮었을지 몰라도 분석은 멈춰 있지 않다. 라캉이 말했듯 주체는 결핍을 중심으로 돌고, 결핍은 언제나 새로운 언표를 요구한다. 11단계 여정을 따라가며 당신이 발견한 것은 “아, 다 풀었다!”는 시원함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해명되지 않은 흔적이었을 것이다. 분석은 바로 그 흔적의 반복을 허락하는 기술이다.

1단계 ‘채집’부터 11단계 ‘서명’까지, 우리는 말실수 하나를 붙잡아 온 우주를 경청했다. 그 과정이 증명한 것은 단 한 가지다. “말은 주체를 소환한다.” 당신이 던져둔 농담 하나, 지나가는 투덜거림 한 줄이 주체를 다시 호출하고, 또 다른 질문으로 당신을 되돌려 놓는다. 그러므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다음 탐정 사건의 서문일 뿐이다.


일상으로 스며드는 11단계

책 속 사례가 아닌 당신의 오늘을 시험 삼아보라.

지하철 광고 문구가 귀찮을 만큼 마음에 걸린다면 ― 1・2단계 채집·분절 의 신호다.


어제 썼던 메일 제목이 어처구니없이 과장되어 보인다면 ― 그 과장이 5단계 전치 로 무엇을 옮겨 놓았는지 물어야 한다.


회의 중 터진 동료의 말실수에 모두가 웃었지만 당신만 뒷맛이 씁쓸했다면 ― 6단계 압축 을 통해 겹친 이름을 풀어 헤쳐야 할 차례다.


11단계는 현미경이 아니라 생활 리듬이다. 듣고, 반복하고, 떨림 속에 틈을 내고, 거기서 또 말을 불러낸다. 그러다 보면 무의식이 훔쳐 쓴 가면이 불쑥 눈에 띄고, 당신은 한 발짝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타자가 내 안에 말을 걸 때

라캉은 욕망을 "타자의 욕망"이라 불렀다. 당신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사실은 타자가 당신을 경유해 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분석은 동시에 윤리의 기술이다.

1. 경청 ― 타인의 실언이 지니는 어긋남을 교정하려 들기보다, 그 여백을 함께 머무를 수 있는가?

2. 번역 ― 상대의 시니피앙을 서둘러 내 언어로 환산하지 않고, 낯섦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가?

3. 보류 ― 이해 불가능한 지점을 무리하게 메꾸지 않고, 공백의 불편을 견딜 용기가 있는가?

이 세 가지를 지키는 한, 분석은 타자를 굴복시키는 권력이 아니라 존엄을 보존하는 대화가 된다. 라캉이 사랑을 “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차이를 견디는 행위”라 정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직 쓰이지 않은 각주를 위하여

읽는 동안 밑줄 그은 문장, 불현듯 떠오른 추억, 설명되지 않지만 마음을 떠나지 않는 단어들. 그 조각들을 노트 한 귀퉁이에 **“나만의 시니피앙”**으로 남겨 두라. 언젠가 다시 읽을 때, 전혀 다른 이야기로 재등장할 것이다. 분석은 선형이 아니라 나선이다. 같은 지점을 돌아도 한층 올라선 자리에서 세계를 다시 본다.

“분석이 멈추는 곳에서, 언어는 새로운 궤도를 그린다.”

이제 공은 당신에게 넘어갔다. 무의식은 내일도 당신보다 먼저 말을 꺼낼 테지만, 그 말을 다르게 들을 준비가 된 이는 바로 당신이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무의식이 만났던 시간에 대하여

“읽는다” 는 행위는 당신의 무의식과 나의 무의식이 교차하는 사건이었다. 만약 이 책이 당신 일상에 작은 균열을 냈다면, 그 틈새로 자라날 새로운 서사를 기꺼이 기다리겠다. 언젠가 당신이 들려줄 이야기 앞에서 다시 학생이 되기를 소망하며.

“나는, 그가 내게 한 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자크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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