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그 사람과 안 맞는 진짜 이유

by 홍종민

방송을 보고 있었다. 어느 육아 예능이었다. 부부가 모두 막내인 집에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갑자기 "엄마 아빠는 나한테만 의지하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스튜디오 패널들이 웃었다. "애가 의젓하네요!" "기특한데요?"

그런데 화면 속 아이 표정이 묘하게 무거웠다. 웃지 않았다. 카메라가 부모를 비췄다. 둘 다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멈춰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발터 토만의 문장이 떠올랐다. 가족치료 분야를 개척한 심리학자 토만은 형제 순서가 평생을 결정한다고 봤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다루고 돌볼 때 자신들의 형제 경험을 활용한다. 원가족에서 형제자리가 막내였던 부모들은 그런 기회가 없었다"(토만, 2009: 72).

형제자리는 그렇게 작동한다. 의식 밖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장남으로 산다는 것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 여덟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빈의 좁은 집에서 프로이트만 혼자 방을 썼다. 동생들은 좁은 공간을 나눠 썼다.

이게 작은 차이일까. 아니다. 이게 전부다.

어머니 아말리에는 프로이트를 "나의 황금빛 지기"라고 불렀다. 여동생이 피아노를 치면 시끄럽다고 피아노를 치워버렸다. 프로이트가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였다. 동생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는 그게 당연하다고 배웠다. 장남은 특별하다. 장남은 보호받는다. 장남은 중심이다.

1902년 빈에서 정신분석 학회를 만들었다. 수요일마다 모였다. 프로이트는 늘 특정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 앉지 못했다.

칼 융이 다른 의견을 냈다. 프로이트는 배신이라고 받아들였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성(性) 이론에 반대했다. 프로이트는 추방했다. 오토 랑크가 출생 트라우마를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결별했다.


왜 그랬을까.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장남에게 동생은 따라오는 존재다. 복종하는 존재다. 자기 뜻을 꺾고 형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 프로이트는 제자들을 동생처럼 대했다. 어머니가 자기 동생들을 대하듯.

그런데 신기한 건, 프로이트 아래로 여동생이 다섯이었다는 거다. 남동생은 한 명뿐. 프로이트는 '여동생들만 있는 오빠'로 자랐다.

그래서일까. 프로이트는 여성을 "보호해야 할 존재"로 봤다. 약한 존재. 남성을 부러워하는 존재.

여동생 로자는 오빠의 도움으로 교육받았다. 여동생 파울라는 오빠가 결혼을 허락해야 했다. 프로이트는 여동생들의 보호자였고, 판단자였고, 결정권자였다.

정신분석 이론 전체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버지와 경쟁하는 아들. 초자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면화된 것. 방어기제. 자아가 위협받을 때 작동하는 것.

모두 장남의 눈으로 본 가족이었다. 중심은 나. 아버지와 나. 어머니와 나. 동생들은 주변. 여자들은 보호 대상.

1939년 런던에서 죽을 때까지 프로이트는 장남으로 살았다. 정신분석학회라는 그의 가족에서 그는 절대 아버지였다. 누구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둘째로 산다는 것


알프레드 아들러는 1870년 빈에서 여섯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 위에서 비교당했다. 이름도 똑같았다. 지그문트.

형은 건강했다. 아들러는 구루병으로 네 살까지 제대로 걷지 못했다. 형은 공부를 잘했다. 아들러는 처음엔 평범했다. 형은 아버지의 기대를 받았다. 아들러는 열외였다.

그런데 둘째에겐 둘째만의 무기가 있다. 앞서가는 사람을 보며 배운다. 따라잡으려는 의지가 생긴다.

아들러가 네 살 때 바로 아래 동생이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침대 옆에서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봤다. 무력했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로 했다. 죽음에 맞서기 위해.

이게 둘째의 방식이다. 앞서가는 사람을 보고, 배우고, 극복하려 한다.

1902년 프로이트의 수요 모임에 초대받았다. 처음엔 존경했다. 형을 존경하듯. 프로이트는 나이도 많았고, 이미 명성도 있었다. 아들러는 배우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이가 보였다. 프로이트는 성(性)을 말했다.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불안.


아들러는 다른 게 보였다. 열등감. 그리고 그걸 극복하려는 의지.

왜 달랐을까. 형제자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장남인 프로이트는 성적 욕망을 봤다.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욕망. 장남은 실제로 그런 욕망을 갖는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니까.

둘째인 아들러는 열등감을 봤다. 형을 따라잡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둘째는 실제로 그런 욕망을 갖는다. 형 그늘에서 살아야 하니까.

1911년 결별했다. 프로이트가 추방했다. "그는 더 이상 내 학생이 아니다." 장남의 선언이었다.

아들러는 개인심리학회를 만들었다. 둘째의 독립이었다. 형과 다른 길. 형이 가지 않은 길.

아들러의 핵심 개념은 "출생 순위"였다. 첫째는 왕위를 빼앗긴 왕. 둘째는 경주자. 막내는 귀여움 받는 존재.

이건 아들러 자신의 이야기였다. 형을 평생 따라잡으려 했던 경주자. 열등감을 극복하려 했던 둘째.

더 흥미로운 건 그의 이론이 프로이트보다 민주적이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위계를 만들었다. 아버지-어머니-자식. 아들러는 평등을 말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협력해야 한다."

왜 그랬을까. 장남은 위계가 편하다. 자기가 위니까. 둘째는 위계가 불편하다. 자기가 아래니까. 그래서 평등을 말한다.

1937년 스코틀랜드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아들러는 둘째로 살았다. 프로이트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간 둘째.

그의 무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았다."


형제자리는 반복된다


발터 토만은 이 두 사람의 이론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가족치료 분야에서 토만은 단순히 첫째냐 둘째냐가 아니라고 봤다. "남동생이 있는 첫째"와 "여동생이 있는 첫째"는 완전히 다르다. 부모의 형제자리도 중요하다.

막내 부모가 첫째 아이를 키우면 서로 안 맞는다. 부모는 동생 돌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아이에게 의존한다. 아이는 부담스럽다. "왜 나한테 의지하지?"

그 TV 화면 속 아이가 그랬다. "엄마 아빠는 나한테만 의지하네요." 항의였다.

토만의 관찰에 따르면 막내 부모는 자녀를 키울 때 무력감을 느낀다. 자기도 책임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녀가 믿음직해지기를 바란다. 간절하게.

문제는 아이다. 집에서는 의젓하게 굴 수 있다. 부모를 위해. 하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학교에서는 무너진다. 선생님이 보기엔 "갑자기 왜 저래?" 싶지만, 집에서 쌓인 게 터지는 거다.

형제자리는 복제된다.

프로이트는 장남이었고 장남을 키웠다. 아들 마르틴도 장남. 서로 편했다. 같은 경험을 했으니까.

장남 아빠가 장남 아들을 키우면 통한다. 둘 다 책임감을 아니까. 막내 엄마가 막내 딸을 키우면 통한다. 둘 다 귀여움 받는 게 익숙하니까.

그런데 장남 아빠가 막내 딸을 키우면? 답답하다. "왜 책임감이 없지?" 막내 엄마가 장남 아들을 키우면? 버겁다. "왜 애가 이렇게 고집이 세지?"

우리는 원가족 패턴을 반복한다. 자동으로. 의식 없이.

여동생 돌본 경험이 있으면 배우자도 챙긴다. "내가 해줘야지" 자동이다. 오빠한테 의지한 경험이 있으면 남자 관계에서 그걸 재현한다. "이 사람이 날 지켜줄 거야" 기대한다.

문제는 상대 형제자리다.

둘 다 장남? 서로 책임지려다 충돌. 둘 다 막내? 서로 의지하려다 실망.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결별한 것도 그래서다. 장남과 둘째는 함께 못 간다. 프로이트는 "따라와야지" 생각했다. 아들러는 "내 목소리를 내야지" 생각했다.

둘 다 옳았다. 자기 형제자리에서는.


당신의 형제자리


당신은 몇째인가.

그게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싸우는 방식도. 일하는 방식도.

토만은 이렇게 정리한다. "오빠가 있는 딸은 여동생이 있는 아버지와 서로 잘 지낸다. 반대로, 남동생이 있는 첫째 딸은 남동생이 있는 어머니와 잘 지낼 수 있다"(토만, 2009: 76).

원리는 간단하다. 익숙한 걸 반복한다.

오빠 있는 여자는 여동생 있는 남자와 잘 맞는다. 둘 다 이성 형제 다루는 법을 아니까. 남동생 있는 여자는 남동생 있는 엄마와 편하다. 같은 경험 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

의식하는 거다.

"아, 나는 지금 장남 모드네." "아, 저 사람은 막내였으니까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아, 우리 아이는 둘째인데 나는 외동이니까 이해가 안 되는구나."

자각하면 자동 반응을 멈출 수 있다. 다른 방식을 시도할 수 있다.

장남이 항상 책임지려 하면 의도적으로 동생에게 맡겨본다. 막내가 의존하려 하면 의도적으로 주도해본다.

어색하다.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가능하다.

프로이트는 평생 장남으로 살았다. 그게 한계였고 천재성이었다. 장남 아니었으면 정신분석학 못 만들었을 거다.

아들러도 평생 둘째로 살았다. 그게 상처였고 통찰이었다. 둘째 아니었으면 열등감 이론 못 만들었을 거다.

당신 형제자리도 마찬가지다.

저주이면서 선물이다.

그걸 아는 것. 그게 자유의 시작이다.

형제자리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의식하면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다.

오늘부터 물어보라.

나는 몇째인가. 상대는 몇째인가. 우리가 반복하는 이 패턴은 어디서 왔는가.

거기 모든 관계의 비밀이 있다. 당신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집착하고 회피하는 이유가 있다.

형제자리라는 보이지 않는 각본.

그걸 읽어내는 순간, 당신은 연기하는 배우에서 각본을 고치는 작가가 된다.


참고문헌: 발터 토만(2009). 가족상담과 형제자리. 창원: 경남가족상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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