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할머니의 슬픔이 내 눈에 고였다

by 홍종민

상담실 창문으로 늦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던 날, 한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른여섯, 두 아이의 어머니.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 깊은 곳에 고인 슬픔이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왜 찾아오셨나요?"

내 질문에 그녀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내가 수십 년간 상담을 하면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었다.

"제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아요. 마치... 누군가의 대본을 따라 연기하는 것 같아요."


운명의 패턴 -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정확한 반복


스물다섯의 미스터리


가족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패턴들을 발견하게 된다. 할머니가 스물다섯에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어머니도 정확히 스물다섯에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았고, 당신 역시 스물다섯에 결혼을 했다면 이런 일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이 큰 고생을 했는데, 아버지도 비슷한 나이에 사업에 실패했고, 형이나 오빠도 그 나이가 되니까 왠지 모르게 불안해한다면 이런 패턴들은 단순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으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내 상담실을 찾은 그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스물다섯에 결혼했고, 알고 보니 어머니도, 할머니도 모두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 첫 아이를 스물일곱에 낳았다는 사실이었다.

"우연이겠죠?"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가족 연구의 거장 모니카 맥골드릭은 이런 현상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녀는 40년이 넘는 연구 경험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가족들은 비록 서로 다른 도시에, 때로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더라도, 최소 3세대에서 최대 5세대까지 하나의 거대한 정서적 생태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사주에 새겨진 가족의 기억


흥미롭게도 사주를 볼 때도 이런 패턴은 명확히 드러난다. 한 집안의 사주를 대대로 펼쳐놓고 보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처럼 비슷한 오행의 기운이 반복된다.

할아버지의 사주에 인성(印星)이 과다했다면 손자의 사주에서도 인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할머니의 식상(食傷)이 발달했다면 손녀도 비슷한 배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을 단순히 '팔자'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유기체가 자신의 미완성 과제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스물다섯에 결혼하면서 포기했던 대학 진학의 꿈이 있었다면, 그 미련과 한이 딸과 손녀의 무의식에 새겨져 같은 나이에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마치 완성하지 못한 퍼즐 조각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맞추려 하는 것처럼.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것들

더욱 신비로운 것은 이런 패턴들이 의식적인 전달 없이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너도 스물다섯에 결혼해라"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손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나침반에 이끌리듯 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업은 위험하니까 조심해라"라고 경고한 적이 없는데도, 아들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똑같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을 관찰하면서 맥골드릭은 가족이라는 것이 단순히 혈연으로 연결된 개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인터넷처럼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부분에서 일어난 일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13세의 저주 - 세대를 관통하는 트라우마의 그림자


충격적인 반복의 사례


맥골드릭이 소개한 사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13세 소녀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어떻게 트라우마가 세대를 걸쳐 전수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한 가족의 13세 딸이 가출을 했다. 그 시대에 13세 소녀가 혼자 히치하이킹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소녀는 살해당했다. 부모는 이 끔찍한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딸을 화장하고,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부부는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딸을 낳았다. 그들은 이번에는 딸을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 태어난 딸도 정확히 13세에 가출을 한 것이다.


3세대에 걸친 비밀의 고리


이번에는 다행히 부모가 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름 끼치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하필 13세에, 왜 하필 가출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졌다.

어머니에게는 13세에 죽은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 너무나 큰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심지어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이제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할머니 세대에서 13세 딸의 죽음, 어머니 세대에서 13세 쌍둥이 언니의 죽음, 그리고 현재 세대에서 13세 딸의 가출. 3세대에 걸쳐 13세라는 나이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반복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모르는 비밀이라도, 그 비밀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파장은 세대를 거쳐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13세라는 나이는 이 가족에게 죽음과 상실의 나이였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기억이 세대를 걸쳐 전수되면서, 13세 딸들은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Monica McGoldrick, 2007).


내 상담실에서 만난 비슷한 사례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내 상담실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수없이 목격했다.

한 남성은 마흔둘에 갑자기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사업도 잘되고 있었고, 가정도 화목했다. 그런데 사주를 보니 그의 대운이 바뀌는 시기였고, 가족사를 탐구해보니 그의 아버지가 정확히 마흔둘에 사업 실패로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마흔둘에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가족들이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마흔둘이라는 나이가 가족에게 위험한 나이라는 것을.


모니카 맥골드릭의 혁명적 발견


개인을 넘어 가족으로


모니카 맥골드릭이 가족 연구 분야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한 것을 넘어서, 인간을 이해하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꿨다는 데 있다. 그녀가 활동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심리 연구는 철저히 개인 중심적이었다. 우울증 환자가 있으면 그 개인의 뇌 화학 불균형을 찾거나, 어린 시절의 개인적 트라우마를 탐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맥골드릭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그녀는 수많은 가족들을 연구하면서 한 가지 일관된 패턴을 발견했다.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제로는 가족 전체의 패턴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자. 전통적인 개인 중심 접근에서는 그의 개인적 성격이나 뇌 화학 불균형,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맥골드릭은 그의 가족 전체를 조사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아버지도 같은 나이에 우울증을 앓았고, 할아버지도 비슷한 시기에 술에 의존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그 나이에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을 떠났다는 것이다.


가족 지노그램의 혁신


맥골드릭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가족 지노그램(Family Genogram)**을 체계화한 것이다. 지노그램은 단순한 가계도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관계 패턴, 감정적 역학, 반복되는 사건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도구다.

지노그램을 그려보면 놀라운 패턴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3세대에 걸쳐 남자들이 모두 40대에 사업에 실패했다든지, 여자들이 모두 20대 후반에 결혼했다든지, 특정 나이에 가족을 떠나는 패턴이 반복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패턴들이 의식적인 계획 없이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너도 40대에 사업해라"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손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각본에 따라 40대에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가족 내에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상담실에서 지노그램을 그려가며 내담자의 가족사를 탐구한다. 그럴 때마다 놀라운 패턴들이 드러난다. 한 여성의 경우, 지노그램을 그리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의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그녀 자신 모두가 서른다섯에 이혼했던 것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것은 가족의 무의식에 새겨진 각본입니다."


한국적 맥락에서의 세대간 전이


맥골드릭은 또한 문화적 배경이 가족 패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이는 당시 서구 중심적이었던 가족 연구 분야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한국 가족의 경우 효(孝) 문화가 세대간 전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면서, 자녀들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부모의 기대에 맞추려 한다. 이런 패턴이 3-4세대에 걸쳐 반복되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자기 억압적 패턴을 물려받게 된다.

또한 한국 가족에서는 체면 문화가 강하게 작용한다. "가족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자신의 문제를 숨기고,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한다. 이런 패턴이 계속되면, 가족 내에서 진정한 소통이 어려워진다.

내가 상담한 한 여성은 평생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 부모님이 원하는 배우자. 그리고 마흔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그녀의 어머니도, 할머니도 똑같은 삶을 살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효 문화가 만들어낸 세대간 전이의 그림자였다.


세대간 전이의 메커니즘


무의식적 모델링


맥골드릭은 세대간 전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녀에 따르면, 세대간 전이는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난다:

첫째, 무의식적 모델링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보다는 행동을 따라 배운다. 부모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술을 마시지 마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술을 마신다면, 아이는 부모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학습한다.

한 내담자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서른이 되어 돌아보니,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찾고 있었고, 아내와 싸울 때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저는 아버지를 증오했는데..." 그가 울먹였다.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당신은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행동 패턴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적 모델링입니다."


감정적 전염


둘째, 감정적 전염이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자동으로 모방하는 거울 뉴런을 가지고 있다. 불안한 어머니 곁에서 자란 아이는 자동으로 불안한 감정을 학습하게 된다. 이런 감정 패턴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는 것이다.

내가 상담한 한 가족의 경우, 3대에 걸쳐 여성들이 모두 극심한 불안 장애를 앓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 평생 불안에 시달렸고, 그 불안은 딸에게, 그리고 손녀에게 전해졌다. 손녀는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지만, 할머니와 똑같은 불안 증상을 보였다.


가족 내러티브의 전수


셋째, 가족 내러티브의 전수다. 가족마다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 가족은 원래 힘들게 살았어", "우리 가족 남자들은 다 술을 좋아해", "우리 가족은 공부를 잘해야 해" 같은 이야기들이 세대를 거쳐 전해지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그 이야기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한 내담자의 가족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다 일찍 죽는다." 실제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오십대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내담자는 오십이 가까워오자 극심한 죽음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것은 가족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침묵의 파괴적 힘 - 말하지 않은 것들의 대물림


억압된 기억의 역설


13세 소녀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침묵이다. 할머니는 13세 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쌍둥이 언니의 죽음을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이런 침묵이 3세대에 걸쳐 같은 비극을 반복시켰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억압된 기억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의식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건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박혀서, 더욱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13세 딸의 죽음을 의식적으로 잊으려 할수록, 그 기억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이런 억압된 기억은 비언어적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표정, 목소리 톤, 몸짓, 그리고 13세라는 나이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이 딸에게 전해진 것이다. 딸은 왜 13세가 되면 불안해지는지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은 그 나이를 위험한 나이로 인식했다.


트라우마의 세대간 전수


최근 과학계에서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트라우마가 단순히 개인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켜서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자녀들을 연구한 결과, 이들이 실제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유사한 스트레스 호르몬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는 부모의 트라우마가 생물학적 차원에서 자녀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3세 소녀의 사례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경험한 13세 딸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트라우마가 그들의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켰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 전해져서 13세라는 나이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내 상담실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만났다. 한 여성은 임신 중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이유를 탐구해보니, 그녀의 할머니가 일제강점기에 임신 중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어머니를 거쳐 그녀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비밀이 만드는 가족의 정서적 지진


가족 연구에서는 비밀을 가족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강력한 요인으로 본다. 비밀은 마치 지하에 묻힌 폭탄과 같아서, 언제든지 터져서 가족 전체를 흔들 수 있다.

13세 소녀의 사례에서 비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다:

첫째, 비밀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쌍둥이 언니의 죽음을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이는 부부 사이에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면, 그 사람과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

둘째, 비밀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을 만들었다. 13세라는 나이가 되면 왜 불안해지는지 아무도 의식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가족 전체에 그 나이에 대한 무언의 공포가 있었다. 이런 불안은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강렬했다.

셋째, 비밀은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다. 13세 딸들이 왜 가출하고 싶어하는지, 왜 집을 떠나고 싶어하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적절한 대응도 불가능했다.


다른 가족들의 비밀 패턴


성적 비밀의 대물림

13세 소녀의 이야기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비슷한 패턴은 많은 가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적 비밀의 경우: 할머니가 혼전임신을 해서 큰 수치심을 느꼈다면, 이것이 가족 내에서 성에 대한 금기로 작용할 수 있다. 성에 대한 건전한 대화가 불가능해지고, 다음 세대들도 성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

내가 상담한 한 여성은 결혼 후 성관계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탐구해보니, 그녀의 증조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던 것이다. 이 비밀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성에 대한 공포와 수치심은 4대에 걸쳐 전해졌다.

정신적 질병의 비밀

정신적 질병의 비밀: 할아버지가 우울증을 앓았지만 이를 가족이 숨겼다면, 다음 세대들은 자신의 우울 증상을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정신적으로 강해야 해"라는 무언의 압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남성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다. "우리 집안에는 정신병자가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가족사를 조사해보니, 그의 할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비밀을 알게 된 후, 그는 비로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경제적 실패의 비밀


경제적 실패의 비밀: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이 큰 고생을 했지만 이를 숨겼다면, 다음 세대들은 돈에 대한 불안이나 성공에 대한 강박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만난 한 기업가는 사업이 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파산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알고 보니 그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사업 실패로 가족을 파탄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숨기려던 가족의 노력은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만들어냈다.


비밀의 세대간 전수 메커니즘


비언어적 신호의 힘


비밀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지 살펴보면:

첫째,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서다. 부모가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이는 긴장, 회피, 불안 등이 아이에게 전해진다. 아이는 "아, 이 주제는 위험한 것이구나"라고 무의식적으로 학습한다.

한 내담자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말해준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른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한 것이다.

결핍된 정보가 만드는 환상

둘째, 결핍된 정보를 통해서다. 가족사에서 특정 부분이 비어있거나 모호하다면, 아이는 그 부분에 대해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런 환상이 때로는 실제 사실보다 더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

한 여성은 평생 자신이 입양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살았다. 가족 사진첩에 그녀의 영아 시절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단순히 사진을 잃어버린 것이었지만, 이 공백은 그녀에게 평생의 정체성 혼란을 만들어냈다.

행동 패턴의 무의식적 전수

셋째, 행동 패턴을 통해서다. 말로는 하지 않지만, 특정 상황에서 보이는 부모의 행동 패턴이 아이에게 전해진다. 13세 소녀의 경우, 부모들이 13세 딸에 대해 보이는 무의식적 불안이 딸에게 전해진 것이다.


패턴 인식의 중요성 - 자각에서 시작되는 치유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13세 소녀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바로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 딸을 찾은 후, 가족의 숨겨진 역사가 밝혀지면서 비로소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는 세대간 전이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가 인식임을 보여준다.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행동이나 감정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해진 패턴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 우리 가족에게는 이런 패턴이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그 패턴에 대한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진다.

가족사 탐구의 필요성

맥골드릭이 강조한 것처럼,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가족사를 더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들이 어떤 트라우마를 경험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상담실에서는 내담자들에게 가족 인터뷰를 권한다. 살아계신 어른들을 만나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놀랍게도 많은 비밀들이 이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비밀들이 밝혀질 때, 내담자들은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새로운 이야기 쓰기


가족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면,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대신 그 패턴을 이해하고,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과거의 고통이 미래의 이해로 바뀔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세대간 전이를 이해하는 진정한 의미다.

한 내담자는 가족의 패턴을 이해한 후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요. 제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이것은 제 잘못이 아니었어요. 이것은 가족의 유산이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저는 선택할 수 있어요. 이 패턴을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를 쓸지."


운명을 넘어서


세대간 전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운명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물려받은 패턴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13세 소녀의 가족이 비밀을 밝히고 패턴을 이해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더 이상 13세는 죽음의 나이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나이가 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가족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다. 우리는 조상들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증오를 물려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수동적 상속자가 아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는 저자이기도 하다.

맥골드릭의 연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가족의 패턴을 이해하고, 비밀을 밝히고, 침묵을 깨뜨릴 때, 우리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더 나은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

할머니의 슬픔이 내 눈에 고였다면, 이제 그 눈물을 닦아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과거를 이해하되 거기에 갇히지 않고, 패턴을 인식하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가족의 유산을 존중하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 이것이 세대간 전이를 넘어서는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모니카 맥골드릭Monica Mcgodlrick/ 남순현, 황영훈 역. “가계도 분석을 통해 본 세계 유명인의 가족비밀” 2007: 27-28, 서울: 학지사. 일부 재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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