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아프다고 말한 적 없는데, 몸이 먼저 알았다

아픈 이유는 다른 데 있다

by 홍종민

검사 결과는 정상, 하지만 나는 아프다


작년 겨울,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온몸이 아픈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대."

그녀는 지난 석 달 동안 여섯 군데 병원을 전전했다고 했다. 내과에서 시작해 정형외과, 신경과, 류마티스내과까지. MRI도 찍고, 피검사도 수십 가지를 했지만 모든 수치는 정상이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스트레스성"이라며 신경안정제를 처방했다.

"내가 꾀병 부리는 것 같대. 아니면 정신병자거나."

친구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좌절이 섞여 있었다. 분명히 아픈데, 아무도 그 아픔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억울함이 느껴졌다.

이런 경험,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분명 어딘가 아픈데, 검사 결과는 늘 "정상"이라고 나온다. 의사는 "별일 아니니 푹 쉬세요"라고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자 대리언 리더는 이런 현상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 몸의 증상들이 단순히 의학적 원인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 그 속에는 마음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리더의 책 『우리는 왜 아플까』를 읽으며,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들의 몸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언니가 암에 걸렸을 때, 내 삶이 무너진 이유


리더가 소개한 39세 여성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그녀의 가족사는 비극 그 자체였다. 할머니, 어머니, 이모, 고모... 3대에 걸쳐 여섯 명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전자 검사 결과 그녀도 BRCA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의사들은 예방적 유방절제술을 권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정신과를 찾은 것은 자신이 암 진단을 받았을 때가 아니었다. 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3년이 지난 후였다.

언니의 암 진단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10년 넘게 다니던 안정적인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일용직을 전전했다. 평범한 일상을 버리고 위험한 나이트클럽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음주운전을 일삼았고, 3년 동안 네 번의 교통사고를 냈다. 마치 죽음을 부르는 것처럼.

왜 그랬을까? 왜 언니가 아프자 자신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을까?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몇 년 전 만났던 한 여성을 떠올렸다. 그녀는 쌍둥이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을 자는 것이 죄스럽다고 했다. "언니는 영원히 잠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잘 수 있겠어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잔인하게 괴롭히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리더의 분석에 따르면, 39세 여성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왜 나는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가족 모두가 암으로 죽어가는데 자신만 건강하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젊은 시절 했던 방탕한 생활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놀라운 것은 이렇게 위험하게 살면서 오히려 불안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자기 파괴가 역설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 것이다. 마치 "이제야 나도 벌을 받고 있어"라고 안도하는 것처럼.

그러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녀에게 아이를 갖자고 했다. 미래를 계획하자고 했다. 그 순간 그녀의 자기 처벌 시스템이 흔들렸다. 새 생명에 대한 책임,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녀를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처럼 토하는 14세 소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14세 소녀가 기숙학교에서 심한 구토 증상을 보였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병원을 전전했다. 소화기내과, 신경과, 감염내과... 어머니가 원한 것은 명확한 진단명이었다. "이것은 바이러스 감염입니다" 혹은 "위염입니다" 같은 확실한 답변. 하지만 모든 검사는 정상이었다.

결국 소녀는 심리상담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모는 1년 전 이혼했다.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고, 어머니는 딸을 기숙학교에 보냈다. 소녀는 "버려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위산 역류로 고생했다는 것. 종종 구토를 했고, 그럴 때마다 소녀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등을 쓸어주곤 했다.

이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구토는 단순한 신체 증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증상을 가짐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려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마다 나도 왠지 배가 아팠다. 어머니는 "너도 할머니처럼 아프고 싶은 거니?"라고 물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기 위해 때로 이상한 방법을 선택한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투를 쓴다. 그리고 때로는... 같은 증상을 갖는다.


심장을 자동차처럼 생각하는 우리들


리더는 재미있는 관찰을 하나 더 제시한다. 서구인들이 심장을 설명할 때 자주 자동차 비유를 쓴다는 것이다.

"심장이 펌프질을 한다" "혈관이 막혔다"
"연료가 부족하다" "엔진이 과열됐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몸을 기계처럼 생각한다. "몸이 고장 났다", "정비가 필요하다", "부품을 갈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은유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다. 우리가 몸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이해 방식이 우리의 증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는 독특한 은유가 또 있다. 바로 "화(火)"다. 우리는 "화가 치민다", "울화가 터진다", "화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감정을 불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은 유독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오르는 증상을 많이 호소한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온 정신과 의사가 한국의 '화병'에 대해 물었다. "왜 한국인들만 이런 병이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감정을 불로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불은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국에서는 감정을 압력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폭발할 것 같다'고 하죠."

문화마다 몸과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그 이해 방식이 우리의 증상을 만들어낸다.


진짜 아픈 것과 가짜 아픈 것 사이


"제 증상이 진짜인가요, 아니면 제 머릿속에만 있는 건가요?"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진짜'임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의학적 진단명이 없으면 마치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리더가 강조하듯, 이런 이분법 자체가 문제다. 정신과 신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실제로 위산이 많이 나온다. 우울하면 실제로 면역력이 떨어진다. 불안하면 실제로 심장이 빨리 뛴다. 마음의 고통은 몸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고통은 100% 진짜다.

내 친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가 온몸이 아프다고 했을 때, 나는 물었다.

"언제부터 아팠어?" "한... 6개월 전부터?" "그때 무슨 일 있었어?" "없는데... 아, 엄마가 치매 진단받으셨지."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설마... 그것 때문에?" "몸이 어디가 제일 아파?" "등이랑 어깨... 너무 무거워서 못 견디겠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엄마를 돌보는 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서 그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엄마잖아. 내가 어떻게..."

그녀의 등과 어깨 통증은 실제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돌보는 무게, 그 책임감과 죄책감이 실제 물리적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아픔들


현대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스트레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증상들도 나타났다.

스마트폰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우리. 목은 거북목이 되고, 손목은 저리고, 눈은 뻑뻑하다. 이것을 단순히 자세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되려 한다. 동시에 그 연결로부터 지쳐간다. 이 모순된 욕망이 우리 몸에 흔적을 남긴다.

SNS를 하며 느끼는 감정을 생각해보라. 남의 행복한 사진을 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좋아요'를 기다리며 느끼는 불안. 댓글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우리 몸 어딘가에 쌓인다.

한 20대 청년이 만성 두통으로 찾아왔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본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쉴 새 없이 콘텐츠를 소비했다.

"왜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심심해서요. 아니... 불안해서?" "뭐가 불안한데요?"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놓치는 것 같아서."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봐 두려운 마음. 이것이 그의 두통의 한 원인이었다.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뇌가 과부하 상태였던 것이다.


한국인의 몸, 한국인의 마음


한국인에게는 독특한 증상이 있다. 바로 '화병'이다.

서양 정신의학 교과서에는 없는 병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다 안다.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치밀고, 한숨이 나오고, 억울한 그 느낌.

왜 한국인에게만 이런 병이 있을까?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다. 참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고, 표현하는 것은 철없는 것이라고. 특히 여성들은 더 그랬다. 시집살이를 하며, 남편의 외도를 참으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 억눌린 감정들이 '화'가 되어 가슴에 쌓였다.

60대 여성이 화병으로 찾아왔다. 40년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어머니의 구박, 남편의 무관심, 자식들의 불효.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화를 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왜 참으셨어요?" "여자가 참아야지, 어떻게 해요." "지금이라도 화를 내보면 어떨까요?" "이 나이에 무슨..."

그녀의 가슴에 쌓인 40년의 화. 그것이 병이 되었다. 약으로 치료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는 것, 그 억울함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패턴, 반복되는 아픔


우리는 모두 패턴을 가지고 있다. 같은 유형의 사람과 연애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방식으로 아프다.

한 30대 남성은 3년마다 한 번씩 급성 요통으로 쓰러진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디스크라고 했지만, 3년 주기가 너무 정확해서 이상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패턴이 있었다. 3년마다 직장을 옮겼고, 그때마다 요통이 왔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담,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허리 통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자 그대로 "허리가 휘는"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또 다른 여성은 연애할 때마다 방광염에 걸렸다. 의학적으로는 성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심리적 의미도 있었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때마다 불안해요. 버림받을까 봐." "방광염이 생기면 어떻게 되나요?" "남자친구가 걱정해주죠. 병원도 같이 가주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아픔을 통해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족의 병, 나의 병


우리는 가족의 병을 물려받기도 한다. 유전자가 아니라 무의식을 통해서.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담배를 끊었는데도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아들이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은 후 딸이 거식증에 걸렸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가족의 고통을 함께 짊어진다. 그것이 가족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40대 여성이 원인 모를 복통으로 찾아왔다. 검사상 이상은 없었다.

"어머니는 건강하신가요?" "어머니요? 작년에 대장암 수술받으셨어요." "지금은 어떠신가요?"
"항암치료 중이세요. 많이 힘들어하세요." "어머니가 아프신 부위가 어디인가요?" "대장이요... 아."

그녀는 자신의 복통이 어머니와 같은 부위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어머니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 복통으로 나타난 것이다.


몸의 언어를 듣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몸의 언어를 들을 수 있을까?

첫째, 시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증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직, 이별, 사별, 이사 같은 큰 변화가 있었는지. 때로는 기념일이 중요하다. 부모님 기일, 이혼한 날, 사고가 난 날...

둘째, 패턴을 찾는 것이다. 언제 아픈지, 누구와 있을 때 아픈지, 어떤 상황에서 악화되는지. 월요일마다 두통이 있다면 출근이 문제일 수 있다. 시댁에 가면 소화가 안 된다면 관계가 문제일 수 있다.

셋째, 은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면 실제로 무언가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숨이 막힌다"면 실제로 숨 쉴 공간이 없는 것일 수 있다. "다리에 힘이 없다"면 실제로 설 자리가 없는 것일 수 있다.

넷째, 2차 이득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프면 무엇이 좋은가? 쉴 수 있는가? 관심받을 수 있는가? 책임을 피할 수 있는가? 이것은 꾀병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아픔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


치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리더가 소개한 39세 여성과 14세 소녀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39세 여성은 심리치료를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인식했다. 살아남은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기 파괴적 행동을 멈추기 시작했다.

14세 소녀는 아버지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건강한 방법을 찾았다.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고, 가끔 만났다. 구토는 점차 줄어들었다.

치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말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슬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내 친구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죄책감이 컸지만, 자신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등과 어깨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이제야 내 몸이 뭘 말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아."

당신의 몸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배고픔, 피곤함, 아픔을 통해서.

하지만 현대 사회는 몸의 소리를 듣지 말라고 가르친다. 배고파도 다이어트하라고 하고, 피곤해도 더 일하라고 하고, 아파도 참으라고 한다. 그러다 정말 크게 아프면 그제야 병원에 간다. 그리고 약으로 증상을 없애려 한다.

리더의 통찰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증상을 적이 아니라 메신저로 보는 것. 몸의 아픔 속에 마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당신의 두통은 무엇을 말하는가? 당신의 요통은 무엇을 호소하는가? 당신의 불면증은 무엇을 거부하는가?

이 질문들이 불편할 수 있다. 차라리 진통제를 먹는 것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진통제는 통증을 없앨 뿐, 통증의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진짜 치유는 몸과 마음이 함께 대화할 때 일어난다. 몸이 하는 말을 마음이 듣고, 마음이 하는 말을 몸이 들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해진다.

아픈 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자. 대신 귀 기울이자.

"내 몸아, 무슨 말을 하고 싶니?"

이 질문으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당신이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참고문헌:
대리언 리더. 『우리는 왜 아플까』 (서울: 동녘사이언스, 2011).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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