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의 전화가 울렸을 때, 나는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4대륙 피겨 선수권을 보고 있었다. 김연아 이후 오랜만에 나온 유망주의 연기에 빠져있던 중,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옛 회사 동료이자 동생 같은 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나중에 걸었을 텐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형,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무거운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톤이었다.
"작년 5월에 어머니가 백혈병 진단을 받으셨어요. 10월에...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선수의 날렵한 움직임과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형이 작년에 사주 봐주실 때 말씀하셨잖아요. 가족이나 친인척의 초상이 있을 수 있다고. 그때는 믿지 않았는데..."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 봄, 회사 근처 카페에서 그의 사주를 봐주었을 때였다. 나는 죽음은 하늘의 뜻이라 사주에서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그저 조심하라는 의미였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말을 예언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만날 수 있을까요? 온천에서요. 사우나하고 식사 대접하고 싶어요."
온천이라니? 문득 예전에 그가 자주 온천을 다닌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주말에 온천 다녀왔어요"라고 하던 그였다. 그때는 단순한 취미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하나의 의례였을지 모른다.
맹정현의 『멜랑꼴리와 검은 마술』을 읽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먼저 목욕재계를 한다. 몸을 정갈하게 한 후 음식을 차려 제를 올리고, 그 음식을 나눠 먹는다. 온천에서 몸을 씻고 고깃집에서 연기를 피우며 식사하는 것도 어쩌면 현대적 제사 의례와 닮아있다. 반찬과 고기, 공기밥의 배치는 제사상의 구조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아, 그는 애도 작업을 하고 싶은 것이구나.
두 번째 전화는 며칠 후에 왔다. 이번엔 더 구체적인 이야기였다.
"형, 제가 정말 화가 나는 게 뭔지 아세요? 형과 누나가 어머니 돌아가신 지 3개월도 안 돼서 집을 팔고 이사를 갔어요. 어머니가 평생 사셨던 집인데... 너무 빨리, 너무 가볍게 모든 게 정리되어 버렸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아쉬움이 뒤섞여 있었다. 피겨 스케이팅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모든 연기가 무겁고 서정적으로 시작해서 밝고 경쾌하게 끝나듯, 형제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너무 빨리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요즘 어머니 얼굴이 자꾸 떠올라요. 버스 타고 가다가도, 밥 먹다가도... 그럴 때마다 너무 괴로워요."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에서 이렇게 구분했다. 애도는 상실을 인정하고 슬퍼한 후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충분한 애도 없이 너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면, 슬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는다. 그것이 멜랑콜리아다.
대리언 리더의 『우리는 왜 우울할까?』를 읽다가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애도하는 사람은 무엇을 상실했는지 어느 정도 아는 반면, 멜랑콜리아 환자에게는 무엇을 상실했는지가 늘 분명하지는 않다." 그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은 알지만, 어머니와 함께 무엇을 잃었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약속한 날, 나는 그를 만나러 갔다. 변두리의 오래된 온천이었다. 평일 오후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탕 안에서 그는 말없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형, 저 어릴 때 어머니랑 목욕탕 자주 갔어요. 어머니가 때 밀어주시던 기억이 나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온천은 그에게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공간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는 의례였을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반복적 행동을 '반복 강박'이라 부른다. 하지만 모든 반복이 병리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상실을 견디기 위한 자기만의 의례가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이 시바(Shiva, 7일간의 애도 기간)를 지키고, 한국인들이 3년상을 치르는 것처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는 한우를 주문했다. 숯불에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연기가 피어올랐다. 향을 피우는 것 같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저희 어머니가 백혈병 진단받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뭔지 아세요?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라고 하셨어요. 일흔도 안 되셨는데..."
한국 어머니들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뭘 좋아하셨어요?"
"김치찌개요. 진짜 김치찌개 하나는 끝내주게 끓이셨어요. 그리고... 트로트 좋아하셨고, 화투도 잘 치셨어요. 명절 때마다 고스톱 판 벌이셨죠."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그는 편안해 보였다.
라캉의 애도 이론을 다룬 맹정현의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이것이다. 애도란 단순히 '잃어버린 대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사랑했던 나를 포기하는 과정'**이라는 것.
우리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던 그 시선, 그 온기를 놓아주지 못한다. 어머니가 불러주던 "우리 아들", 아버지가 쓰다듬던 머리, 그들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나. 그것을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애도의 완성이다.
"어머니가 저를 '막내야'라고 부르셨어요. 서른 넘어서도 계속 막내야, 막내야... 이제 아무도 저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아요."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애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눈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군가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한참을 울던 그가 말했다.
"형들은 왜 그렇게 빨리 정리했을까요? 어머니 물건들, 사진들, 다 버렸어요.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가족마다 애도의 방식은 다르다. 어떤 이들은 빨리 잊으려 하고, 어떤 이들은 오래 기억하려 한다. 둘 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지 못할 때 갈등이 생긴다.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김치찌개를 직접 끓여보는 건 어때요? 어머니 레시피대로요.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트로트도 들어보고, 어머니가 가고 싶어 하셨던 곳이 있다면 대신 가보는 것도 좋겠네요."
"어머니가 제주도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평생 비행기 한 번 못 타보셨거든요."
"그럼 제주도에 가보세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마음으로."
유교의 3년상은 단순히 3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기간 동안 계절이 열두 번 바뀌는 것을 경험하며, 고인 없는 일상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봄에는 고인이 좋아했던 꽃을 보며 울고, 여름에는 고인과 함께 먹었던 수박을 먹으며 웃고, 가을에는 고인이 입었던 옷을 정리하며 추억하고, 겨울에는 고인 없는 첫 명절을 보내며 적응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 장례식 3일이 끝나면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사는 사별 휴가를 일주일밖에 주지 않는다. 슬퍼할 시간도, 울 공간도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지연된 애도, 복잡한 애도를 경험한다.
한 상담 사례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잃은 한 여성은 2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방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매일 아침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안녕하세요, 아버지"라고 인사했다. 가족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봤지만, 그것이 그녀만의 애도 방식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한 남성은 매주 어머니가 다니던 성당에 갔다. 신자도 아니면서 미사에 참석했다. 어머니가 앉던 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부르던 성가를 들었다. 그것이 그의 애도였다.
"형, 저도 이상한 짓을 하나 하고 있어요."
그가 고백했다.
"어머니 휴대폰 번호를 아직 안 지웠어요. 가끔 문자를 보내요. '어머니, 오늘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하고. 미친 짓이죠?"
"아니에요. 그게 형의 애도 방식이에요. 언젠가는 그 번호를 지울 날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는 계속 문자 보내세요."
디지털 시대의 애도는 또 다른 양상을 띤다. 고인의 SNS 계정, 카톡 프로필, 휴대폰 사진첩.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바로 지우기에는 너무 아프고,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생생하다.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조언했다. "디지털 유품도 물리적 유품과 마찬가지로 단계적으로 정리하세요. 처음에는 자주 보다가, 점점 보는 횟수를 줄이고, 마지막에는 특별한 날에만 꺼내보는 식으로요."
그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어머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와 억지로 웃고 있는 그의 모습.
"이 사진 지워야 할까요?"
"지우지 마세요. 하지만 첫 화면이나 자주 보는 앨범에는 두지 마세요. 따로 폴더를 만들어 보관하고, 어머니 생각이 날 때만 꺼내보세요."
우리는 식당을 나와 다시 온천으로 갔다. 노천탕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몇 개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어머니가 별이 됐다고 생각해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별이 됐든 안 됐든, 형 마음속에는 계속 계실 거예요. 다만 그 존재가 더 이상 형을 아프게 하지 않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프로이트는 애도 작업을 '현실 검증'의 과정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과정.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이다.
"형,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오히려 더 가까이 계신 것 같아요. 살아계실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전화드렸는데, 지금은 매일 생각나요."
이것도 애도의 한 과정이다. 물리적 존재가 심리적 존재로 전환되는 과정. 밖에 있던 대상이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내재화'라고 부른다.
영화 <코코>에서 보여주듯, 죽은 이들은 산 자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그들이 진정으로 죽는 것은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을 때다. 하지만 그것도 또 다른 형태의 삶일 수 있다.
시간이 늦어 우리는 온천을 나왔다. 주차장에서 헤어지며 그가 말했다.
"형, 오늘 고마웠어요. 누구한테도 이런 얘기 못했는데..."
"언제든 또 연락해요. 애도는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끔 할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개 맛이 그립다. 그 맛을 다시는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기억만으로도 따뜻하다.
며칠 후,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형,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김치찌개 끓여봤어요. 맛은 영 아니었지만, 끓이는 동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어요."
그것이 애도다. 울고 웃으며 고인을 기억하는 것. 그들이 남긴 빈자리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남긴 사랑을 간직하는 것.
윈 호프만Wynn Hoffman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물리적 존재에서 상징적 존재로, 밖의 대상에서 안의 대상으로."
몇 주 후, 그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형, 제주도 다녀왔어요. 어머니 사진 들고요. 성산일출봉에서 일출 봤는데, 어머니가 '우와, 이쁘다'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애도의 과정을 잘 거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실은 삶의 일부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잃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완벽한 안전을 잃고, 젖을 떼며 전능한 만족을 잃고, 성장하며 순수를 잃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둘 잃는다.
하지만 상실이 끝이 아니다. 상실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잃음을 통해 가졌던 것의 소중함을 안다. 부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다.
애도는 그 과정을 돕는 의례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그리워하고, 충분히 울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형, 이제 어머니 휴대폰 번호 지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받은 그의 메시지였다.
"아직 안 지웠지만, 이제 지울 준비가 된 것 같아요."
그것이 애도의 완성이다. 놓아줄 준비가 되는 것. 하지만 놓아준다는 것이 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더 안전하게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상실을 건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애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기억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인간이 상실을 견디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