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홍종민 Dec 10. 2025 brunch_membership's
상담 수련을 받을 때였다. 슈퍼바이저가 내 상담 녹음을 듣고 말했다.
"당신, 너무 많이 말하네요."
나는 당황했다. '내가 상담사인데 말을 안 하면 뭘 해?'
"내담자가 5분 말하면 당신이 10분 말하더군요. 진단하고, 설명하고, 조언하고. 그런데 이상한 건, 내담자가 다시 안 온다는 거예요."
그때는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열심히 했다. 정확하게 진단했다. "당신은 불안애착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거예요." 해결책도 제시했다. "이렇게 하시면 좋아질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내담자들이 몇 번 오다가 끊겼다.
옆 상담실 선배는 달랐다. 예약이 3개월씩 밀렸다. 나는 몰래 선배 상담을 엿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선배는 거의 말을 안 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음..." "그래서요?"
내담자가 말하는 시간이 80%였다. 선배가 말하는 시간은 20%도 안 됐다. 그런데 내담자가 돌아갈 때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많이 정리됐어요."
그 순간 번쩍 깨달았다. 바로 이거다. 내가 틀렸던 거다.
진단을 내리는 순간 그들은 떠난다
한 30대 여성이 상담실을 찾았다. "남자친구랑 자꾸 싸워요. 제가 문제인가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애착 유형이 보였다. 방어기제가 보였다. 패턴이 보였다.
그래서 말했다. "당신은 불안형 애착이에요. 어릴 때 부모님이 일관되지 않은 양육을 하셨죠? 그래서 지금 남자친구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거예요. 이건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리고 두 번 더 왔다가, 연락이 끊겼다.
나는 의아했다. '정확하게 봤는데? 왜 안 오지?'
그때 브루스 핑크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핑크는 이렇게 경고한다. "분석가가 실제로 그런 문제를 심의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능력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판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이미 분석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핑크, 2021: 71).
바로 그거다. 내가 "당신은 불안형 애착입니다"라고 진단을 내리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어진다. 진단받았으니까. 문제가 규정됐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내가 듣고 싶어 할 말만 하기 시작한다. "네, 어릴 때 엄마가 그랬어요." 진짜 속마음은 감춘다. 상담사가 원하는 답을 맞춰주기 시작한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핑크는 더 나아가 말한다. "만약 분석가가 내담자에게 어떤 환상은 나쁘고 또 어떤 충동이나 욕망은 비정상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석 밖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분석 속에선 분석 주체가 그런 것들을 말하길 꺼리게 될 것이다"(핑크, 2021: 71).
딱 이거다. 진단을 내리고 판단을 하는 순간, 내담자는 입을 닫는다. 상담사가 나쁘다고 할 것 같은 이야기는 감춘다. 그러면 진짜 치유는 시작되지 않는다.
질문하면 그들은 말하기 시작한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상담 방식을 바꿨다. 진단을 내리는 대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40대 남성이 왔다. "저는 우울증인가요?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요."
예전 같으면 우울증 체크리스트를 물어봤을 것이다. PHQ-9 점수를 매겼을 것이다. "네, 중등도 우울증으로 보입니다. 약물치료와 상담을 병행하시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번엔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드시다고 하셨는데,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한 6개월 전부터요."
"6개월 전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승진 탈락한 것. 후배가 먼저 올라간 것. 아내가 실망한 것. 자신이 무능한 것 같다는 것. 30분 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아내한테 어떻게 말씀하셨어요?" 가끔 이렇게만 물었다.
진단은 안 했다. 우울증이라는 말도 안 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갈 때 말했다. "선생님, 오늘 많이 시원해졌어요."
핑크는 정확히 이 지점을 짚어낸다. "분석가는 전이 현상 그 자체를 해석하기보다, 다시 말해 내담자가 분석가에게 무엇인가를 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보다, 전이의 내용(관념적 내용과 감정적 내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내담자로 하여금 그것을 말로 표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핑크, 2021: 79).
바로 이거다. 해석하지 말고,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내담자가 말하기 시작하면, 그 과정 자체가 치유다.
그리고 한 주 뒤, 그는 다시 왔다. 또 왔다. 6개월 동안 꾸준히 왔다.
내담자는 이미 당신을 믿는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내가 진단도 안 하고 조언도 안 하면, 내담자가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