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문화권에 아직 호기심이 남아 다녀온 호주의 남반구를 제외하고 필리핀 같은 휴양지를 빼고 미국, 영국, 캐나다 중에 고르기로 했다. 총을 드는 미국은 아직 조금 무섭고, 비 오는 칙칙한 영국은 끌리지 않았고, 덜 익숙한 캐나다로 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도시를 알아보다가 캐나다에서 가장 따뜻한 Victoria(빅토리아)를 선택했다. 조금 더 검색을 해봤더라면 다른 곳으로 정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겨울은 우기라서 비가 많이 내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았다. 내가 영국을 피한 이유가...(좌절)
아무튼, 브런치 북 '교실 밖 영어 문화 체험기_호주'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준비했고, 홈스테이 숙소는 Homestaybay에서 찾았다. 홈스테이베이 사이트는 따로 계약 절차가 없다. 나처럼 3주 가량 단기숙박의 경우에는 디파짓도 따로 요구하지 않는 듯하고, 이 점이 불안하게 다가왔다. 연락으로는 친절한 노부부가 사는 곳인데 흉흉한 세상이라 걱정이 된다. 출국 전날에 잠을 꽤 설쳤다.
넷플릭스에서 Maid(조용한 희망)을 보았다. 빅토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서 보기 시작했는데 아직 시리즈를 다 보지는 못 했다. Maid를 왜 조용한 희망이라고 번역했는지 찾아보니, 우리말로 번역한 하녀는 외설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가 있고, 가정 청소부는 그다지 매력적인 제목이 아니다. 스토리에 맞게 감성적인 제목을 붙이니 조용한 희망이라는 제목이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가정청소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내용인데, 빅토리아의 여러 부잣집을 청소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캐릭터로 나오니 결말은 관련해서 조금 더 희망찬 이야기로 마무리되리라 짐작한다.
내가 기대하던 그림과 조금 달랐다. 내가 비행기 표를 끊을 때까지만 해도, 빅토리아는 항구도시, 온화한 기후, 아름다운 정원, 평화로운 주택가.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겨울이 우기에, 해가 짧고, 꽤 춥고 비가 많이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내가 지낼 홈스테이 숙소 주변 챌트넘거리(Cheltenham St)는 치안이 좋고 가족 단위 주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한다. 집도 깔끔하고 예뻐서 중심가와 거리가 조금 떨어졌지만 여기로 골랐다. 아주머니가 크리스마스에 캐나다에 오지 못해 아쉽다며 집에 꾸민 트리 사진을 보내주셨다.
암울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지낼 날들에 설렌다. 아침에 첼트넘 거리를 지나 어학원으로 향하는 길, 비 냄새 섞인 맑은 공기를 마시는 상상을 해본다. 어학원에서 만날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조금씩 트여갈 나의 영어, 그 속에서 발견할 새로운 나의 모습들!
이제 정말 짐을 싸야 한다. 요즘 몸이 좀 피곤해서일까 준비가 게을러졌다.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날씨에 맞는 옷을 고르고, 비 오는 날을 대비해서 우산을 챙겼다. 장화를 꼭 들고 가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단출하게 짐을 싸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비가 많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장화는 신발장에 그대로 두었다. 섣부른 기대나 걱정을 내려두고 있는 그대로를 느껴보자고 다짐하며 캐리어를 닫는다. 자러 누웠는데 손톱을 깎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손톱을 다듬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았던 빅토리아는 어떤 곳일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뒤척이다 잠이 겨우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