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지은과 동현 그리고 할머니가 있는 쪽을 째려보았다. 정확히는 동현과 지은의 손이 있는 곳을 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지은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네 명이 있는 공간엔 정적이 감돌았고 서로 말없이 응시했다. 정적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지만 들려오는 알람이 그것을 방해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알람이었다.
설탕 시럽을 졸이기 위해 세팅해 놓은 알람이었는데, 시간이 다 되었는지 울리고 있었다. 알람소리를 듣고 지은은 정신이 들었다. 부담스러운 그 네 명의 무리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지은은 부엌에 들어가 울리던 알람을 껐다. 그리고 끓이던 흑당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많이 졸여져 있었고 음료를 만들기 위해 식혔다. 손님이 시키신 흑당밀크티에 들어가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졸이던 흑당을 식히며 지은은 방금 그녀의 눈빛을 떠올렸다. 이 음료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흑당을 바라보았다. 방금 마주쳤던 그 차가운 눈빛을 녹여주기를....
힌 흑당을 밀크티에 넣어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컵 안쪽 테두리에 흑당 시럽을 짜 한번 둘렀다. 지은은 단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 때마다 한 번만 짜는 것이 아쉬웠지만 일단 정석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대로 만들기로 했다.
밀크티를 담을 컵으로 시크한 매력이 있는 파란색 컵을 선택했다. 파란색은 그녀에게 청량한 가을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손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은은 컵 받침대까지 준비해서 컵을 들고나갔다.
“주문하신 흑당 밀크티 나왔습니다.”
지은은 바 형식 테이블 앞에 카운터에서 음료를 내밀어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살짝 살펴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음료를 살짝 내려놓고 와주었다.
“그러면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지은은 바 형식 테이블 앞쪽에 서 있던 곳에서 벗어나 다시 할머니와 동현이 있던 테이블을 향해 이동하려고 하였다. 그때 손님의 입이 떨어졌다.
“저기 테이블에 있는 남자랑 사귀세요?”
“네?” 너무나 당황스러운 말에 지은은 눈이 동그래졌다. 당황스러운 건 동현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지은이 그를 바라보았을 때 동현의 눈도 더 이상 커지지 못할 만큼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지은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고 질문했다.
“아니 서로 빵도 주고 하셔서 서로 사귀는 사이인가 해서요!” 손님의 입을 삐죽삐죽 거리면서 말했다.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지은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뇨. 서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그는 이 카페의 단골이세요..”
실은 단골뿐만이 아니라 서로 같이 활동도 하지만 굳이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고 지은은 생각했다. 손님은 지은과 동현을 번갈아 째려보며 바라보더니 방금 말에 수긍을 한 듯 눈빛이 누그러들었다.
“근데 저기... 무슨 일이 있으신가..? 저 둘이 사귀는 게 왜 젊은 처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신지...”
그녀의 말이 끝나고 그녀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영자할머니는 질문을 하셨다. 실제로 둘이 사귀는 것이 그녀에게 왜 중요한지 의아한 일이긴 했다.
“그러니까요.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가만히 있다가 저분과 이렇게 얽히게 된 것 자체가 너무 불쾌한 일인데요.”
평상시의 재수 없는 성격은 어디 못 간다고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이번엔 지은이 그를 째려보았다. 지은은 살짝 자세를 바꾸어 동현을 등지게 섰다. 지은 본인도 동현과 서로 사귀는 사이로 오해를 받게 된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는데, 황당했다. 마치 고백할 생각도 없었는데 먼저 차인 기분이라 언짢았지만, 손님의 앞이라 표현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손님은 동현과 할머니의 얘기를 듣더니 흐음 하면서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곧 본인의 행동에는 당연한 사유가 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사람을 사귈 때는 신중하게 잘 살펴봐야 하거든요.” 그녀는 눈썹을 위로 추켜올리면서 말을 했다.
“괜히 사람 한번 잘못 사귀었다가 모든 걸 다 바치고 마음도 전부 보냈다가 상처받고 돌아오기 일쑤니 까요..!”
그녀는 긴 손톱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 소리는 굉장히 신경질 적이었는데, 아마 그녀의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하는 버릇임에 틀림없었다. 손님은 숨을 짧게 들이쉬고 크게 내쉬었다. 안 좋은 그녀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앞의 흑당 밀크티에 손을 뻗어 그녀는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고 한 모금 입에 머금더니 그 맛을 음미했다. 그녀의 눈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미하게 움직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소믈리에가 와인을 즐기는 모습 같아 보였다.
“맛이.. 꽤나 괜찮네요.!”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사랑으로 안 좋은 일을 겪었나 보네요. 그럴 수 있어요. 그것도 다 젊을 때 한때 할 수 있는 행동들이죠.” 할머니도 그녀의 소믈리에 같은 행동을 따라 꽃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을 했다. 할머니도 그녀처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거 같아 보였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그녀는 기억을 떠올리고 슬퍼 보였다면, 할머니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슴이 아픈 사랑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요..” 소믈리에 같은 의기양양한 표정은 온 데 간데없고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동현을 향해있던 고개를 돌려 앞으로 향했다. 빈 테이블에서 마치 무엇을 찾듯이 그곳을 멍하니 응시하며 말했다.
지은이 그녀가 쳐다보는 곳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치 그녀의 눈에는 지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흑당 밀크티에 손을 뻗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 맛을 음미했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죠. 그와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는 거 같고 그 어떠한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죠.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는 평생을 같이 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예쁘게 칠해놓은 립과 모양들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지은은 그녀가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고 입술은 피가 안 통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어요. 필요한 것들이라면 전부 다 해주고 싶었고 그래도... 그래도 너무 행복했어요....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하더라도 너무 행복했죠.”
다시 그녀는 손을 들어 책상을 손톱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힘이 없는 상태로 두들겼다.
“하지만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어요.. 결국에 저는 계속 혼자 그에게 주는 사람이 되었고, 이 관계가 계속되어 봤자 저만 상처받을 것을 알았죠.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관계가 끝났지만... 그래도 아직 마음이 아프네요..”